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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8-08 (금) 10:41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6750    
신천성서(神天聖書) 최초의 중국어 성경
조훈/총신대 교수
Ⅰ.신천성서의 탄생 배경

로버트 모리슨은 런던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에 의하여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모리슨의 선교여행은 순조롭지 못하여 런던을 출발한 지 113일만인 1807년 9월 4일에 천신만고 끝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런던선교회가 모리슨에게 부여한 직접의 임무는 중국어의 습득, 중영사서의 편찬, 장래의 선교를 위한 성경의 중국어역이었다.
그런데 중국에 도착한 모리슨은 재빨리 다음과 같은 사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①그가 영국에서 들었던 것보다도 훨씬 중국인과 교제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점.
②동인도회사를 포함한 영국의 관헌이 그의 마카오 및 광동에서의 체재를 아주 귀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
③가톨릭 교회가 그에 대하여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점.
④미국인들이 그에게 친절하지만, 미국인의 친절이 영국인인 그에게 오히려 괴롭게 느껴지는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슨은 선교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모리슨은 그의 선교 사업의 추진을 저해한 요소로서 ‘첫째 중국인, 둘째 포루투갈의 승려들, 셋째 영국 동인도회사 당사자의 엄중한 규정’을 들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모리슨의 활동은 첫째로 청조 정부의 엄중한 기독교 금지 하에서 저작 활동을 중심으로 해서 활약할 수 있는 장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둘째로 선교사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동인도회사마저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선교는 단념하고 장래의 선교 사업의 발전에 대비하여 저작 활동을 중심으로 한 기초적 공작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기초적 공작 중에서도 핵심적인 사업이 바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초 런던선교회가 모리슨에게 부여한 임무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모리슨은 마카오에 상륙한 지 수주간이 지난 후 영국의 런던선교회에 그 동안의 경과와 도래할 활동의 전망에 대한 보고서를 써서 보내었다. 그 보고서에서 그는 우선 첫째로 중국은 모리슨의 체재를 허가하지 않음을 기술하였고, 다음에 포루투갈인은 그들의 식민지인 마카오에 그가 사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게다가 그 자신에 대해서는 ‘중국인과 만나지 않고, 외국인과도 교제하지 않으며 몰래 광동에서 살면서 일을 진행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기술하였다.
광동에 정착한 직후 모리슨이 알아차린 것은 그 곳에 체재하고 있던 유럽인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복음적 신앙 부흥의 최고조기에 있던 영국과 미국인의 생활을 본 모리슨에게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중국 대중 속에서 행해지고 있던 우상 숭배, 그들의 교활함, 그들 상호간의 미움은 청년 선교사 모리슨에게 대단한 마음의 고통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모리슨은 홀로 충실하게 주일을 지켰다. 혼자서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그를 파송한 영국 교회를 위하여, 또한 그를 에워싼 중국과 중국 민중을 위하여 드려졌다.
모리슨은 바깥의 세계를 보자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졌으므로 물러나 오로지 중국어를 배우고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외계로부터 단절되어 성경 번역에 몰두한 모리슨을 괴롭힌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아득히 먼 중국에 파송되어 와서 많은 비용을 쓰면서 중국인에 대하여 아무런 전도의 손을 뻗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러한 괴로운 심경을 때때로 영국에 써 보내었다. 이에 대하여 런던의 선교 본부는 그가 처해 있던 괴로운 입장을 잘 이해하고 그에게 동정하여 통신으로써 이 청년 선교사를 위로하였다. 특히 1809년의 런던선교회의 연차 보고서 속에 그 총회가 모리슨이 기울이고 있던 노력과 인내심에 대하여 이해와 감사의 결의를 한 것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Ⅱ.신천성서의 번역 과정

로버트 모리슨은 영국에서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 1805년에 우연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四史攸編耶蘇基利斯督福音之會編, Evangelia Quatuor Sinice. 이하에서는 사사유편으로 약칭함)』라는 표제의 문서를 발견하였다. 그는 그의 중국어 교사였던 용삼덕(容三德)과 함께 이 문서를 필사하였다. 이는 모리슨이 성경을 중국어로 역출함에 있어서 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사사유편』은 17세기에 가톨릭계의 파리외국선교회(Soci t des Missions Etranges de Paris) 소속의 선교사 바세(J. Basset)에 의하여 역출되어서 사용되던 2절판의 문서였다. 그런데 이 문서가 1737년이나 1738년에 당시 동인도회사의 지배인이던 호즈선 2세(Mr. Hodgson Jr.)의 명령에 의하여 광동에서 개작되었고, 1739년에 그가 영국으로 갖고 돌아와 당시 영국 학사원(The Royal Society)의 회장이던 한스 슬로안 경(Sir Hans Sloane)에게 증정하였다. 또 다시 슬로안 경이 이 문서를 대영박물관에 유증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슬로안 초본(Sloane Manuscript)이라고 칭해졌고, 일반적으로는 The Manuscript Harmony라고 칭해졌다. 『사사유편』의 내용은 「대조사복음서(對照四福音書, The Harmony of the Four Gospels)」, 「사도행전」 및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리슨은 성경의 중국어역에 즈음하여 성경의 원문에 충실함과 함께 번역문이 명쾌하고도 단순함에 유의하였고, 또한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은 고전적 용어보다도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던 용어를 선택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리슨이 최초로 번역에 착수한 것은 「사도행전」이었다. 모리슨은 「사도행전」의 번역 원고를 중국에 갖고 와서 그것을 몇 차례나 통독하였고, 또한 그리이스의 원전과 대조하여 또 다시 고쳐 쓰는 방식으로 축어역하여 그가 만족할 만한 단계에 도달하자 번역을 완료하였다. 1810년 8월 모리슨은 「사도행전」 1,000책을 채로흥(蔡盧興)에서 목판 인쇄로 출판하였다. 출판비로는 모리슨의 당초 예상의 10배 이상인 1부당 반 달러 이상으로서 총 100 파운드가 들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극히 고가였다. 그러나 모리슨이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출판한 이유는 그것이 분책일 지라도 최초로 중국어의 성경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 번역·제판·인쇄·출판이라는 단계의 일이 모두 중국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후 런던선교회로부터 잇따라 경제적 원조가 있었고, 그 밖에도 개인 혹은 단체로부터의 지원이 있어서 자금의 문제는 점차 호전되어 초기의 고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모리슨은 「사도행전」의 번역·출판에 이어서 「누가복음」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모리슨이 양서의 문체의 유사성과 그에 따른 번역의 평이성이라는 점에서 「사도행전」에 이어 「누가복음」을 택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수긍되는 바이다. 1811년 9월 모리슨은 「누가복음」을 번역·출판하여 본국에 보내었다. 계속해서 그 해 안에 「마태복음」·「마가복음」 및 「요한복음」의 번역을 완료하여 출판하였고, 1812년에는 바울 서신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이리하여 모리슨은 중국 도착후 6년만인 1813년 9월에 진노의(陳老宜)·이십공(李十公) 등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서 『신약전서』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광주에서 비밀리에 2천부를 목판으로 인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모리슨이 『사사유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출판한 신약성서는 다음의 14서였다. ( )는 현행 한글판 성경의 서명이다.
1.「使徒行傳」(「사도행전」) 2.「與羅馬輩書」(「로마서」) 3.「哥林多輩第一書」(「고린도전서」) 4.「哥林多輩第二書」(「고린도후서」) 5.「厄拉氏亞輩書」(「갈라디아서」) 6.「以弗所書」(「에베소서」) 7.「 立比書」(「빌립보서」) 8.「可羅所書」(「골로새서」) 9.「弟撒羅尼亞第一書」(「데살로니가전서」) 10.「弟撒羅尼亞第二書」(「데살로니가후서」) 11.「弟摩氏第一書」(「디모데전서」) 12.「弟摩氏第二書」(「디모데후서」) 13.「弟多書」(「디도서」) 14.「 利們書」(「빌레몬서」)이에 대하여 모리슨이 직접 번역한 것은 다음의 13서였다.
1.「馬寶書」(「마태복음」) 2.「馬耳可書」(「마가복음」) 3.「路加書」(「누가복음」) 4.「若翰書」(「요한복음」) 5.「希比留書」(「히브리서」) 6.「者米士書」(「야고보서」) 7.「彼多羅第一書」(「베드로전서」) 8.「彼多羅第二書」(「베드로후서」) 9.「若翰第一書」(「요한일서」) 10.「若翰第二書」(「요한이서」) 11.「若翰第三書」(「요한삼서」) 12.「如大書」(「유다서」) 13.「 若翰現示書」(「요한계시록」)이 중에서 모리슨이 직접 번역한 부분을 그 페이지 수로 계산하면 실로 신약성서 전체의 2/3에 달한다.
모리슨은 1814년 1월 11일부로 영국성서협회에 지금까지 번역과 출판을 원조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 편지를 보내었는데, 그것을 통하여 위대한 사업인 성경의 중국어 번역과 출판에 즈음하여 모리슨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을 갖고서 선인의 노력에 대해 감사를 표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작업이 불완전한 것이었던가를 반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리슨은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가해진 다음과 같은 비판을 솔직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첫째는 가톨릭 교도로부터 가해진 비판과 항의였다. 가톨릭의 어떤 자는 모리슨이 가톨릭 ‘선배’의 번역에 대하여 손을 댐으로써 배교적 행위를 행하였다는 이유로 모리슨역의 성경을 태워버리고 항의하였다. 두 번째 비판은 모리슨이 굳이 그의 불충분한 중국어 실력으로써 번역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가톨릭의 사람들에게 번역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세 번째 비판은 프로테스탄트측 사람들로부터의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모리슨의 번역문을 손에 넣자 가톨릭의 ‘선배’에 의하여 행해진 원문이 거의 변경되지 않았다고 하며 불만을 표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중국어 번역의 완료를 칭송하여 모리슨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1837년에 최초의 일본어 성경의 번역자가 되는 칼 구츨라프(Rev. Karl Friedrich Augusr Gutzlaff)는 그의 명저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1831-1833)의 서문 속에서 ‘이것(신약성서의 중국어 번역의 완료)은 중국을 위하여 행해진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당시 유럽과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치된 찬사였던 것이다.
1813년 7월 7일 윌리엄 밀느(William Milne, 1785-1822)가 광주에 도착한 이후 모리슨은 밀느의 협력 하에 1814년부터 『구약전서』를 번역하였다. 그러나 밀느가 청조 정부 당국과 마카오의 포루투갈인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말랏카로 가서 중국인 선교 기구를 설립하였다. 1815년 4월 17일 모리슨은 양아발(梁阿發)을 비롯한 다수의 인쇄 노동자를 고용해서 말랏카에 보내어 밀느의 성경 인쇄를 돕게 하였던 것이다.
런던선교회에 대한 보고에 의하면 모리슨이 번역한 구약성경은 다음의 27서였다.
1.「創世歷代傳」(「창세기」) 2.「出以至比多地」(「출애굽기」) 3.「利未氏古書」(「레위기」) 4.「算民數傳」(「민수기」) 5.「路得氏傳」(「룻기」) 6.「歷代史紀上卷」(「역대상」) 7.「歷代史紀下卷」(「역대하」) 8.「神詩傳」(「시편」) 9.「諺語書傳」(「잠언」) 10.「宣道書傳」(「전도서」) 11.「以賽亞傳」(「이사야」) 12.「耶利米亞傳」(「예레미야」) 13.「耶利米亞悲歌書傳」(「예레미야애가」) 14.「依西其理書傳」(「에스겔」) 15.「但依理書傳」(「다니엘」) 16.「何西亞書」(「호세아」) 17.「若以利書」(「요엘」) 18.「亞摩士書」(「아모스」) 19.「阿巴氏亞書」(「오바댜」) 20.「若拿書」(「요나」) 21.「米加書」(「미가」) 22.「拿戶馬書」(나훔) 23.「夏巴吉書」(「하박국」) 24.「洗法尼西書」(「스바냐」) 25.「夏哀書」(「학개」) 26.「洗革利亞書」(「스가랴」) 27.「馬拉基書」(「말라기」)이에 대하여 밀느는 구약의 다음 12서를 번역하였는데, 물론 모리슨의 심의·수정을 거친 것이었다.
1.「後備律法傳」(「신명기」) 2.「若書亞傳」(「여호수아」) 3.「審司書傳」(「사사기」) 4.「撒母以勒上卷」(「사무엘상」) 5.「撒母以勒下卷」(「사무엘하」) 6.「列王傳上卷」(「열왕기상」) 7.「列王傳下卷」(「열왕기하」) 8.「以士拉傳」(「에스라」) 9.「尼希米亞傳」(「느헤미야」) 10.「以士得耳傳」(「에스더」) 11.「若百書傳」(「욥기」) 12.「所羅門之歌書」(「아가」)모리슨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출판하는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중국 관헌의 감시와 방해에 줄곧 고통을 당하였다. 때로 관헌의 너무나도 심한 눈초리를 견디기 어려워서 모리슨의 조수들은 그들이 취급하고 있던 성경의 원고를 없애고, 제작한 목판을 불태워버리는 일까지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모리슨은 광동과 마카오를 떠나 말랏카로 옮기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런던선교회에의 보고서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최후까지 인내심을 갖고서 광동과 마카오 지구를 떠나지 않고 마침내 신·구약성서 전권의 번역을 완료하였다. 1819년 11월 25일 신·구약성서의 번역이 완료된 날 모리슨은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런던의 선교회 본부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의하여 신·구약성서 전권의 중국어 번역을 오늘 종료하였습니다’ 라고 써보내었던 것이다.
1823년 모리슨은 그가 번역한 성경을 『신천성서』라고 명명하여 21책의 선장본(線裝本)으로서 마카오에서 출판하였다. 이리하여 성경이 출판된 지 1600여년 후에 비로소 중국에 완전히 소개되었던 것이다.

Ⅲ.신천성서의 개역

모리슨이 이룩한 최대의 선교 사업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사업의 수행을 위하여 그의 모든 정력이 기울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완성에는 밀느와 같은 뛰어난 동역자가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업은 확실히 세계 선교사상과 문화사상에서 자랑할 만한 대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천성서는 결코 완전한 번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리슨이 기본적인 근거로 삼았던 『사사유편』과 모리슨역 성경의 원문을 대비해 보면 후자는 그 용어에서 전자를 참조하고 있지만, 또한 성경의 원문에 극히 충실한 축어역을 시도하고 있음이 간취된다. 즉 『신천성서』의 역문은 『흠정역성서(欽定譯聖書, Authorized Version)』의 축어역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런데 엄밀한 축어역은 문장이 명료하지 않을 경우가 있는데, 『신천성서』의 문장은 중국인에게 그다지 알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God'·'Holy Spirit'와 같은 중요한 어휘에 어떠한 중국어를 역어로서 사용하느냐도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모리슨은 성경에서 중요한 용어인 ‘God’를 '신'으로 번역하고, 'Holy Spirit'를 ‘성풍(聖風, 나중에는 성령이 사용된다)’이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점을 자각하고 있던 모리슨은 가까운 장래에 그 자신에 의하여 행해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그 개역이 행해지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특히 그의 차남 죤 로버트 모리슨(John Robert Morrison)이 중국어 성경을 중역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공무에 얽매였기 때문에 희망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은 광대한 나라여서 언어상 중앙에서는 북경 관화(官話)가 사용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각 지방에서는 각각 다른 지방어(local dialect)가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어 성경이 지식층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관화로 번역될 필요가 있었고, 또한 각 지방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각 지방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었다. 이들 각 언어로 성경이 보다 정확하게 역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모리슨의 강한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성경 번역은 최초의 소재에 불과하다는 극히 겸손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835년 죤 모리슨은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구츨라프 및 브리지만(Elijah C. Bridgeman) 등과 위원회를 조직하여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서 중국어 성경의 개정에 착수하였다. 메드허스트는 2개월간의 화북 방면으로의 전도 시찰여행 기간과 1837년에 영국으로 출발하기 까지의 기간에 걸쳐서 가능한 한 각 계층의 중국인을 많이 접하며 『신천성서』에 대한 비판을 구하였다. 유럽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메드허스트는 런던 대학의 교수이자 일찍이 그와 말랏카에서 동역자로서 일하였던 키드(Samuel Kidd)를 비롯한 중국학의 전문가들의 비평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정리해서 개정의 필요를 영국성서협회의 이사에게 설명하여 성서협회로부터 개정 허가와 격려를 받았고, 또한 거기에 소용되는 비용의 보증도 받고서 돌아왔다.
죤 모리슨과 구츨라프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서 분주하였고, 브리지만도 인쇄·언론의 방면에서 다망하였으므로 자연히 영국에서 돌아온 메드허스트가 중심적 위치에 서서 성경의 개역은 진행되었다. 중국 기독교사에서 이 4인에 의한 중국어 성경의 개정 작업을 중국성서개정사에서의 제1회 위원회로 칭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위원회를 시작으로 해서 중국어 성경은 그 후 몇 차례나 단계적으로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전서』의 개정은 메드허스트가 맡아서 1835년에 개정을 완료하자 1837년에 바타비야에서 출판하였고, 그 이름을 『신유조성서(新遺詔聖書)』라고 하였으며, 총 325 페이지의 석판 인쇄본이었다. 『구약전서』는 그 대부분을 구츨라프가 개정하고 메드허스트·브리지만·죤 모리슨이 그를 도와서 대략 1838-40년 사이에 『구유조성서(舊遺詔聖書)』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총 665 페이지였다. 1840년 구츨라프는 『신유조성서』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구세주야소신유조성서(救世主耶蘇新遺詔聖書)』라고 개명하였는데, 이 성경은 뒷날 태평천국에 채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1회 개정위원회의 작업이 종료된 것은 실로 아편전쟁이 발발하는 전년이었던 것이다.
1842년의 남경조약 체결후 상해·영파·복주·하문·광동의 5항이 개방되고 홍콩이 영국령이 되었을 때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들은 그 때까지 갇혀 있던 광동과 마카오에서 이들 개방지구로 이전하여 선교를 개시하게 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중국어 성경의 번역문이 완전치 못하다고 여겼고, 또한 그들이 중국의 각 지방에서 전도하면서 그 때까지 사용된 성경이 지방어로도 역출될 필요를 통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1843년 8월 22일―9월 4일에 각 선교회의 선교사들이 홍콩에서 성경 개정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런던선교회 소속의 다이어(Samuel Dyre)·홉슨(Benjamin Hobson)·렉그(James Legge)·메드허스트·밀느(Wollam C. Milne)·알렉산더 스트로나크(Alexander Stronach)·죤 스트로나크(John Stronach), 미국공리회 소속의 브리지만·로리(Walter M. Lowrie)·다이어 볼(Dyer Ball)·브라운(Samuel R. Brown), 미국남침례회의 딘(Willaim Dean)·로버츠(L. J. Roberts)·샥(J. Lowis Shuck)·맥고완(Macgowan) 등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의 결의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⑴성경을 중문으로 번역하면 이전보다 더욱 널리 출판한다.
⑵유관 신약성경중 단기간에 번역된 것으로서 비교적 진보적인 것은 모든 역본을 위원회에 맡겨 새롭게 수정하도록 건의한다.
⑶설립된 위원회는 구약의 역본을 신약의 수정본과 서로 일치하도록 계획하여야만 한다.
⑷무릇 각 선교회가 대조한 한문 성경의 역본은 의미상 히브리어와 희랍어 원문에 적합하여야만 하고, 성어·문체·체재는 중국 양식에 의하여야만 한다.
⑸역문은 '공인경문(公認經文)'을 원본으로 한다.
⑹대개 도량형·화폐의 명칭은 모두 중국의 수량에 적합하여야만 하고, 자연계의 사물도 서로 같은 명칭을 채택하여야만 한다.
⑺'수세(受洗)'라는 단어는 침례회와 비침례회가 역본에서 두 종류의 판본을 따로 인쇄할 수 있지만, 이 명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로 같아야만 한다.
⑻'상제(上帝)'라는 명사는 역자에 따라 '신'이나 '상제'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는 총위원회에 넘겨 최후에 결정하도록 한다.
⑼무릇 번역 사업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선교사는 모두 이 일에 참여하여야만 한다.
⑽수정 작업은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나눈다.
①사도행전 · 히브리서 · 베드로후서.
②마가복음 · 고린도전후서.
③마태복음 · 빌립보서 · 빌레몬서.
④누가복음 · 로마서 · 갈라디아서 · 에베소서.
⑤요한복음 · 요한서신 · 유다서 · 요한계시록.
⑾수정본의 간행은 어떤 부분의 사람의 작업이 아니라 바로 전체 작업의 성과이다.

1843년의 회의는 중국 선교사의 제1차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역경을 주제로 하였고, 그 일에 참여한 자는 초기에 마카오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주가 되었다.
1847년 6월 중국에 진출한 각 교파의 대표자가 상해의 메드허스트의 집에서 중국어성서개정협의회를 조직하고 성경의 제2회 개정에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경의 번역 사업이 얼마나 곤란한 문제를 안고 있는가를 잘 가리킨다. 또 번역의 경우에도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개인에 따라 역어와 역문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역어 중에서도 god의 역어를 '신'·진신('眞神)'으로 할 것인가 혹은 '상제'로 번역할 것인가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개정에 즈음한 대표위원회가 크게 분규하였다. 브리지만과 미국 출신 선교사는 '신'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메드허스트·구츨라프 등은 '상제'를 채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때문에 미화성경공회(美華聖經公會)는 나중에 '신'을 채용하였던 것이다.
1850년 대표위원회역(Delegate Version, 중국명 文理譯)의 신약이 출판되었다. 이 때의 역경은 광주·홍콩·하문·복주·영파·상해 등지에서 대표를 선출해서 위임하였다. 브리지만은 광주를 대표하였고, 렉그는 홍콩을 대표하였고, 죤 스트로나크는 하문을 대표하였고, 스테판 죤슨(Stephen Johnson)과 화이트(M. C. White)는 복주를 대표하였고, 칼버트슨(M. S. Culbertson)은 영파를 대표하였고, 분(W. J. Boone)·메드허스트·샥·밀느는 상해를 대표하였다. 이 중에서 메드허스트·브리지만·샥·분·밀느 등이 이 때 역경의 주력 인물이었던 것이다.
대표위원회는 신약의 번역을 끝낸 후인 1850년 8월 3일에 회의를 열어 구약의 번역을 상의하였다. 그 후 의견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런던선교회의 메드허스트, 죤 스트로나크 및 밀느 등이 1851년에 탈퇴하였다. 대표위원회는 신약 개정의 원칙에 따라 구약을 수정하였는데, 렉그의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1853년에 완성하여 1854년에 출판하였다. 종전처럼 대표위원회역본이라고 칭하였다. 이 역본은 왕도(王韜)가 참여하였기 때문에 문장이 이전보다 진보하였다. 이후 중문 성경은 개인이나 단체에 의하여 여러 차례 번역되었는데, 그 주요한 사상과 정신은 마카오의 초기 선교사의 그것에 모두 의거하였다.
대표위원회역의 개정성서에 '진신역본(眞神譯本)'과 '상제역본(上帝譯本)'의 두 종류가 병립하게 된 것은 역어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리킨다. 그 후 중국으로 진출해 온 선교사의 수는 매우 많아서 중국 전토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중국어의 성경은 또 다시 개정되었던 것이다.

맺음말

모리슨이 성경의 중국어 번역을 완료하자 그의 이 위대한 사업에 대하여 각계로부터 갈채와 축하가 쏟아졌다. 런던선교회의 서기 버더 목사(Rev. G. Burder, D.D.)는 '우리는 주님께서 이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사용하신 공로자들을 잊어서는 안 되고, 잊지 않을 것이며, 잊지 않는다' 라는 편지를 보내었다. 영국성서협회 위원회는 유사한 내용의 감사와 축하의 편지를 보냄과 동시에 번역본의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하여 추가로 1,000 파운드를 지급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미국성서협회 위원회는 그 경의와 찬동의 표시로 화려하게 장정된 최고의 8절판 성경을 모리슨에게 선물하였고, 미국공리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 for Foreign Mission)는 최대한도로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축하의 편지를 보내었다. 이 밖에 스톤턴경(Sir George Thomas Staunton)과 다수의 저명한 학자들도 이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전 기독교 세계가 느낀 관심의 강도를 증명하기나 하듯이 유사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어 성경의 연구가인 무어헤드(Muirhead)와 훼리(J. Wherry)는 모리슨이 번역한 중국어 성경에 대하여 “모리슨과 밀느 두 사람의 중국어 성경은 최초의 작업으로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원문을 가능하면 평이한 언어로 번역하고자 힘쓴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아주 유용한 것이 되었다.” 라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각계의 갈채와 축하, 평가를 받은 『신천성서』는 다음과 같은 선교사상의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 『신천성서』는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입화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둘째, 『신천성서』는 당시 중국 선교에 있어서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간접 선교의 일환으로 로버트 모리슨의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셋째, 『신천성서』는 중국 선교에 있어서 제1단계의 목표로 삼아 장래의 선교의 기초를 쌓고자 한 런던선교회의 기본적 태도에 부응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중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준비시대(1807-42년)'의 단서를 여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넷째, 『신천성서』는 향후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개역하는 데에 있어서 최초의 소재를 제공하였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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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7-14 (월) 18:42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2593    
선교사 재배치 시급
선교사 재배치 시급  
2003-06-28  
한국교회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지만 선교사들이 특정 지역에 중복 배치돼 있어, 선교사 재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입니다. 보도에 고석표 기잡니다.

우리나라가 파송한 선교사 수는 전세계 만 2천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특정지역에 중복배치된 선교사들이 많아 이들을 재배치하자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한국세계선교협의회를 중심으로 집중 논의되고 있습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백여개에 달하는 국내 선교단체들의 기초 자료조사를 통해 재배치 우선 순위 국가를 발표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흔히 가톨릭 국가로 알려진 필리핀의 경우, 현지 개신교회 숫자가 한국교회보다 많아 선교사 재배치 1순위에 해당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즉 필리핀은 스스로 선교가 가능한 나라로, 더 이상 한국의 선교 대상 국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한정국 선교사. 예장 합신 총회 선교부 총무 >

선교사를 재배치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해당 선교사들의 반발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전체의 발전과 선교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교단 선교부나 선교단체 본부가 선교사 재배치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선교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 강승삼 사무총장. 한국세계선교협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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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6-01 (일) 18:38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5881    
사도신경 형성사

서론: 사도신경의 형성사, 본문 비교, 개정 시안

 1. 신경이냐 신조냐?

신조라는 우리말의 원어는 라틴어 Credo(나는 믿는다)이다. 영어로는 Creed, Cofession이라고 불린다. 사도신경은 중국어의 使徒信經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경(經)은 종교의 경전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조(條)로 바꾸어야 한다(예: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등).

 

2. 사도의 신조냐, 그리스도인의 신조냐?

사도신조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12사도가 온 세계로 선교하기 위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고백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Lufinus),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신조는 신앙의 간결하고 올바른 조항(루터), 신앙의 요약과 개요(칼빈)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사도신조는 오늘날 가장 많이 고백되는 것으므로 사도의 신조라기보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조라고 불러야 적합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은 사도적 전승 위에 서 있으므로 사도신조라는 용어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 신앙고백의 사도적 기원을 존중하는 우리는 사도신조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까지는 없다.

 

3. 사도신조의 '삶의 자리'

사도신조의 '삶의 자리'는 초대교회의 세례식일 것이다. 하지만 사도신조는 세례를 받는 자에 의해 고백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베푸는 자의 질문에 대한 고백적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교회에서 고백과 신앙과 세례가 매우 밀접하게 얽혀있었음을 알게 된다. 신앙 고백의 선언적 형식이 생긴 것은 3세기의 세례문답부터라고 한다.

 

4. 사도신조의 '형성사'

최초의 신조는 이레네우스가 107년에 작성한 것이며, 중요한 신조로서는 니케아 신조(325), 아타나시우스 신조(359), 칼케톤 신조(451) 등이 있다. 사도신조의 원형으로 가장 중시되는 것은 4세기 말 루피누스(Lufinus)가 작성한 라틴어 본문이다. 그 동안 교회들은 서로 다른 세례고백문을 사용해 왔지만, 390년경에 루피누스에 의해 작성된 로마교회의 신앙고백은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비록 그 후에도 어느 정도의 첨가와 변화(예수의 음부행, 공적인 교회, 성도의 교제)가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있는 것과 거의 같다. 오늘날 사도신도의 최종 본문은 750년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도신조의 형성에는 물론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했다. 교회의 통일된 규칙을 제정하는 데 큰 관심을 가졌던 칼(Karl) 대제와 오토(Otto) 1세는 로마에서 이 본문이 받아들여지도록 애썼고, 그 결과로 로마교회의 신앙고백은 유럽교회의 중심적인 신앙고백이 되었다. 비록 사도신조는 지배자의 권력정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적 성격도 본다.

물론 신앙고백은 완결된 것 혹은 완전한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계속 수정, 보완될 수 있다. 사도적인 전승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더 충실한, 그러면서도 시대적 도전에 신앙으로 응답한 고백을 우리는 계속 만들어갈 수 있다(예: 트렌트 신조, 아우구스부르크 신조, 스코틀랜드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바르멘 신학선언 등). 그러나 사도신조는 오늘날까지 세계의 가장 많은 교회가 고백하는 것으로서 역사적, 신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5. 한국교회의 사도신조의 '형성사'

한국교회 초기 우리말 찬송가에 실린 사도신조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고어는 현대어로 고침).

찬양가(언더우드 역,1894년)

찬미가(감리교,1897년)

찬셩가(장로교,1905년)

 찬숑가(장감성,1908년)

나는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참신 성부를 믿으며

나는 천주 아버님 천지를 만드옵심을 믿사오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옵서 천주의 외아들이신 줄을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저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께 나심을 믿으며

예수께옵서 성신으로 잉태하옵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강생하심을 믿사오며

이는 성신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는 성신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나도의 손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예수께옵서 본디오스 빌나도의 손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사와

본디오 빌나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시며

본디오 빌나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리사

 

음부에 내리셨더니

 

사흘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장사 후 제삼일만에 다시 살아나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참신 성부 우편에 좌정하심을 믿으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옵신 천주 아버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이와 죽은이를 심판하러 오실 줄을 믿나이다

그리로서 강림하옵셔서 산 사람 죽은 사람을 다 심판하옵실 줄을 믿사오며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나 성령을 믿으며

나는 성신을 믿사오며

성신을 믿사오며

성신을 믿사오며

거룩하고 공번된 회와

성공회를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거룩한 공회와

성인이 서로 통공함을 믿으며

성도가 서로 교통함을 믿사오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의 사함을 믿으며

죄사함을 믿사오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육신이 다시 삶을 믿으며

몸이 다시 살아날 줄 믿사오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영생을 믿사옵나이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6. 현재 한국교회의 사도신조

개신교

천주교

성공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나 천지를 내신 전능 천주 성부를 믿으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성신으로 인하여 강잉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고성소(古聖所)에 내리시어

음간(陰間)에 내리사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로 좇아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천주 성부 우편에 좌정하심을 믿으며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저리로서 좇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줄을 믿나이다

성령을 믿사오며

성신을 믿으며

나 성신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

성도의 상통함을 믿으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죄의 사함과

죄사함을 믿으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육신이 다시 삶을 믿으며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7. 예수의 음부행이 왜 빠졌을까?

라틴어 본문에 있는 "그는 음부에 내려가셨다"(descendit ad infernas)라는 문장이 유독 현재의 한국 개신교회의 사도신조에서는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1894년의 찬미가에 실린 최초의 사도신조에는 "지옥에 내리사"가 들어 있었는데, 1897년의 감리교 찬미가에서는 이 문장이 빠져 버렸으며, 1905년의 장로교 찬셩가에는 다시 "음부에 내리셨더니"가 삽입되었다. 그런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회가 합동해서 만든 찬숑가에서는 이 문장이 다시 빠져 버렸다. 그 이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추측컨대, 사도신조를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한 카톨릭 교회가 믿는 "연옥설"에 반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빼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예수가 죽은 후에 악인이 들어가는 지옥(음부)에 내려갔다는 점을 받아들이기가 꺼림직하였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더 상세히 거론하기로 하자.

 

8. 개정 시안(이신건)

개정안

이유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사오며

"전능하사'는 잘못된 번역이고, 아버지가 먼저 나오는 것이 논리적임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외아들"은 너무 인간적인 냄새를 풍김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성신"보다는 "성령"이 보편적이고, "잉태하사"는 능동태이므로 수동태로 바꾸어 하며, "에게"는 일반적으로 여격이므로 탈격으로 바꾸어야 함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라틴어 본문에 sub(아래서, 치하에서)라는 전치사가 있고, "장사한지"는 능동태이므로 수동태로 바꾸어야 함

음부에 내려가사

라틴어 본문에들어 있고, 대다수 교회가 고백함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은 자"는 단수형이므로 복수형으로 바꾸어야 함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아버지가 먼저 나오는 것이 논리적임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부터"보다 "거기로부터"가 더 적절함

성령을 믿사오며

"성신"보다는 "성령"이 보편적임

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이며 보편적인 교회를 믿사오며

교회의 4대 표지를 모두 다 표명하는 것이 적절하며, "공회"는 세속적인 의미를 강하게 풍김

성도들이 서로 사귀는 것을 믿사오며

"성도"(단수)는 복수로 바꾸어야 하며, "교통"의 의미는 오늘날 달라졌으며, "교제"보다 "서로 사귀는 것"이 더 나음

죄를 용서함 받는 것

능동태보다는 수동태가 저 적절함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

"다시 사는 것"은 재생의 의미가 더 강함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출처/http://sgti.keh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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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5-25 (일) 20:58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3247    
선교와 문화
선교와 문화
이병수 교수(고신대 선교언어)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 복음과 문화의 관계만큼 중요한 주제도 없다.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복음과 여러 문화 사이의 관계성의 문제는 현대 선교학에서 아주 왕성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타 문화권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것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선교에 있어서 문화연구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어지고 있다.
그 중요성을 학자들은 문화연구가 선교사역에 도구가 된다는 것에서 발견한다. 선교학자들은 문화인류학이 선교에 중요한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Grunlan and Mayers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문화인류학의 연구를 통해 문화가 가지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알게 되고 그래서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둘째, 문화인류학이 선교사들에게 주는 실제적인 유익을 언급하는데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주는 것, 문화충격을 완화 및 문화의 적응을 극대화 시켜주는 것, 그리고 상황화 등을 말한다.  
이러한 문화 인류학의 중요성을 문화인류학자인 폴 히버트는 “지난 25년 동안 문화 인류학은 선교사역에 중요한, 아니 필수적인 과목이 되었다. 이제는 문화인류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으면 타문화 선교훈련을 적절히 받았다고 인정되지 않을 정도이다”(Hibert 9, 1997)라고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성경의 지식을 강조하고 있지만 문화에 대해서 부족한 반면에 다른 이들은 현대의 인간 사회와 문화에 강조점을 두어왔으나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신학적 기초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두 가지를 균형있게 발전시키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선교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균형이 절실히 필요하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화의 문제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얼마나 복음이 적실성(Relevance)있게 들려지는가? 적실성이 없을 때는 복음이 이질적이며 공허하게 되고 그것이 지나칠 때는 혼합주의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선교사가 새로운 선교현장에 사역하면서 직면하는 문제는 전통문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인데 즉 새로운 회심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자기 삶의 일부였던 전통 문화, 예를 들면 출생,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 예술 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복음과 문화의 관계 즉 상황화의 세 가지 단계를 살펴본다.

옛것의 부인 : 상황화의 거부

과거의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대부분의 옛 관습들이 이교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해버린 적이 많았다. 이러한 거부는 선교사의 자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에 기인한 것으로, 선교사들은 복음을 자신의 문화와 동일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문화의 관습들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통적 관습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문화적 진공상태를 만들어냈고 또한 서구적인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이질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옛것의 수용 : 무비판적 상황화

전통적인 관습에 대한 두 번째 접근 방법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교회에 수용한 경우인데 이 경우는 옛 관습 및 문화들을 기본적으로 선한 것으로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러한 관습 및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도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혼합주의에 빠지는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것도 또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바 문제점은 그 관습과 문화가운데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며 문화적인 죄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었다.

옛것에 선별적으로 대응함 : 비판적 상황화

옛 방식에 대한 무비판적 거부와 무비판적 수용이 둘 다 선교사역을 저해하는 것이라면 세 번째 접근법은 비판적 상황화로 불리어 질 수 있는, 즉 옛 신념들과 관습들을 거부하거나 수용하기에 앞서 잘 점검해보며 선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세 가운데서 두 가지 대응방식이 나타날 수 있는데 하나는 옛 전통과 문화가 비성경적이 아니라면 신자들은 그 관습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고 옛 전통과 문화가 새로운 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선교사와 토착신자의 신학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함이 필요할 것이다. 더욱이 토착문화에 있어서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변혁시켜가는 비판적 상황화가 이루어져야한다. 이것이 복음과 문화에 있어서 가장 고려되어야 할 상황화의 방법 중의 하나이다.

출처/선교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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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5-01 (목) 11:22
홈페이지 http://www.chinam.org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3702    
박해국가 순위 top 10
2002년 하반기 박해순위 10내 국가의 주요변화

1위 - 북한
북한 기독교인들의 비참한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새로운 보고가 있다. 직접적인 보고와 다른 자료들이 진작에 의심되던 상황을 확인해준다 -북한에서 수감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수감자들보다 더욱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극심한 고문에 노출되어 있다. 임신한 기독교인 여성은 강제로 낙태를 당한다- "나쁜 사상을 가진 자들은 출산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식량부족 때문에 많은 북한 주민들이 중국으로 탈북한다. 이 때문에 중국과 북한이 국경지역의 탈북자들을 검거하는 일은 이제 점점 더 어려워졌다. 탈북자들은 체포되면 북한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한국인/중국인 기독교인들과 접촉한 이들은 격리된다. 이들은 즉시 정치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다. 기독교인들은 정치범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강제로 신앙을 버리고 김일성을 숭배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신앙을 고수하면 종종 처형당한다.

2위 -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군주제도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법적인 보호가 없다. 비이슬람 종교 행위는 공적으로 금지된다. 이슬람이 공식적인 종교이며 모든 국민들이 무슬림이다. 공식적으로, 정부는 비이슬람 외국인들이 사적으로 예배드리는 권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항상 지켜지지는 않는다. 지난 6개월 동안, 14명의 국적을 상실한 기독교인들이 점차적으로 석방되어 추방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지난해 소위 불법적인 기독교 활동들에 대해 법적인 기소도 없이 수감되었다. 5월에 두 명의 필리핀 기독교인들이 성경과 기독교 CD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그들은 한 달 이상 수감되었었다.

3위 - 라오스
"종교의 분파를 만들거나 국민들 사이에 분파를 만드는 모든 행위들"은 라오스 헌법에 의해 금지된다. 분명히, 라오스 정부는 모든 종교행위를 금지하는데 이 조항을 적용한다. 기독교는 그들의 적인 미국과 협력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라오스 정부 전복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받는다. 그러므로 정부는 기독교인 활동들을 심하게 통제하고 국민들 가운데 기독교인의 영향을 제한하는데 열심이다. 정부 관리들이 도시와 마을을 방문하여 기독교인들에 대한 세뇌 강좌를 주최하고 있다. 기독교 훈련 세미나에 참석했던 8명의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불법적인 모임을 연 혐의로 고발되었다.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달후에 석방되었다. 핍박에도 불구하고 라오스의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4위 - 베트남
베트남에서 국가는 박해의 주된 근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공산당은 조직화된 종교가 공산당의 권위와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로, 국가는 기독교가 미국과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양국간에 전쟁과 적대감의 역사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베트남의 태도는 계속 부정적이다. 30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최근 3년에서 12년에 달하는 감옥형을 받았다. 6월초에 또 다른 14명의 베트남 목사들이 중앙 고원 지대에서 체포되었다. 실종된 이들도 있고, 올해 200명의 기독교인들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지난 5년간 약 14,000명의 기독교인이 북서부 베트남에서 박해로 인해 피난을 갔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강제 송환된 이들은 고문을 받았다. 국제인권기구들은 베트남 정부에게 고산 부족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해왔다.

5위 - 투르크메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 활동들은 엄격하게 통제와 제한을 받는다. 정부는 민족 정체성을 재규정하려는 노력 가운데 다수 종교인 이슬람 전통의 일부를 통합시켰다. 투르크멘 사회는 사파르무라트 니야조브 대통령을 둘러싼 개인숭배로 특징지어진다. 대통령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하나님에게 돌리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는다. 기독교로 개종한 투르크멘족은 민족 정체성에 대한 하나의 위협으로 여겨져 공적인 박해와 차별을 받는다. 데이나우에 있는 8명의 기독교인들은 최근에 강제로 신앙을 버려야 했다. 그들은 한 우체부가 그들의 우편물에서 기독교 잡지를 발견하여 체포되었다. 세명은 신앙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잠적했다. 그들은 지금 아쉬가바드 경찰에 의한 조직적 범인수사에 걸려있다.

6위 - 몰디브
이슬람은 몰디브의 국교이다. 다른 종교행위는 법으로 금지된다. 몰디브 국민들은 필수적으로 무슬림이 되어야 한다. 토착 기독교인은 거의 없으며 비밀리에 예배를 드린다. 외국 기독교인들은 전도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적인 예배가 허용된다. 이슬람이외의 다른 종교를 위한 장소는 없다.

7위 - 부탄
부탄 법은 기독교를 금지한다. 국교는 불교이다. 정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종교와 예배의 자유를 부인한다. 사회에서 공적인 종교행위는 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불교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진다. 당국은 불교문화를 유지하기 원한다.

8위 - 파키스탄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류 시민으로 여겨진다. 현재 10명의 기독교인들이 신성모독죄로 수감되어 있다. 이러한 일은 종종 허위 정보에 의해 일어난다. 작년 10월과 올해 3월에, 바하왈푸르와 이슬라마바드에서 교회들이 공격을 받았다. 20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죽었고 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했다. 강경파 이슬람 단체들이 미국주도의 반 테러 전쟁에 대한 파키스탄 정부의 지지에 반대해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9위 - 아프가니스탄
새로 임명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근본주의자 집단의 압력하에, 1년 반 동안의 임시정부 기간에 샤리아(이슬람법) 입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무슬림이 기독교 또는 다른 어떤 종교로 개종하는 것이 금지된다는 의미이다. 지난 12개월간 거의 종교의 자유는 전쟁중인 분당들의 비공식적이고 비문서화된 정책에 의해 결정되었다.

10위 - 소말리아
소말리아에서 이슬람은 국교이다. 법체제가 부분적으로 샤리아법에 근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전도와 개종은 허락되지 않는다. 소수의 비밀 신자들만이 있다.

상황이 악화된 국가들

미얀마에서(버마), 박해는 주로 불교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온다. 그들은 국가의 협력을 얻는다. 특히 카렌과 친 소수 종족들이 사는 지역에서 상황이 위태롭다. 양곤에서는 많은 등록되지 않는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 양곤과 친 지역에서 교회 등록을 받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지난 6개월 동안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모든 종교적 국면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전례없이 엄격했다. 지난해 말에 시작된 논란이 이는 재등록 절차로 인해, 단 125개의 종교 단체만이 재등록절차를 마쳤다. 그중 11개만이 기독교회이다. 몇몇 교회 예배가 습격을 당했고 일부는 경찰에 의해 폐쇄되기까지 했다. 섬가이트에서는 1월말에 두 명의 오순절 지도자들이 기도 모임 중 체포되어 2주일간 수감되었다. 러시아 출신의 개신교도 니나 콮세바는 <종교적 선전>을 했다는 이유로 4월 1일 강제 추방되었다. 교인들은 그녀가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다른 두 명의 여성도도 종교 선전물을 배포한 혐의로 고발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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