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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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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5-01 (목) 11:04
홈페이지 http://www.chinam.org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2528    
한국,아시아에 선교지 집중
각교단 선교사 파송현황 44% 아시아 집중

각 교단의 올 가을 정기 총회 보고서 자료조사 결과 한국선교사 파송 선교지가 주로 아시아 지역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올 가을 정기 총회 기간 보고된 선교사 파송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올 7월까지의 주요 교단 파송 선교사의 44%가 아시아 지역에 집중 배치돼 있다.

교단별 선교지역 아시아 대륙 집중도는 고신이 62%,합정이 52%, 통합이 44%, 합동이 43% 순으로 나타났으며 또한 통합과 고신은 이번 회기에 선교사 증가율이 가장 컸던 교단으로 조사돼 파송 선교사 증가율과 아시아 지역 선교사 파송 비율간의 높은 상관관계를 보였다.

또한 9월 총회를 개최한 합동, 통합, 합정, 기장, 고신, 대신, 기침, 기성, 합신, 개혁(광주), 개혁(서울)총회의 선교사 파송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올 7월까지의 약 200여명의 선교사가 이들 교단으로 부터 파송된 것으로 드러나 '선교한국'으로서의 위상이 재확인됐다.

또한 통합과 고신의 전체 선교사 대비 신규 선교사 파송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회기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통합(총회장:최병곤목사)은 지난해 8월 5일부터 지난 7월 7일까지 2가정 3명만 은퇴했을 뿐이고 63가정 99명을 새로운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로써 통합은 78개국 403가정 737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됐다.

대륙별 파송 현황을 살펴보면, 아시아 17개 국 153가정 291명, 태평양 연안 6개 국 12가정 23명, 북방 7개 국 5가정 91명, 중동 9개 국 18가정 33명, 북미, 중남미, 17개 국 62가정 122명, 유럽 10개 국 22가정 39명으로 아시아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합동(총회장:한명수목사)은 86개 국 52지부 12개 단체에 612가정 1,101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지난해 9월 1일부터 지난 8월 5일까지 31가정 53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나 11가정 20명이 사직했고, 3가정 5명 사역 만료, 1가정 1명 소천, 3가정 6명 휴직, 2가정 3명 은퇴 및 퇴직으로 20가정 34명이 선교지를 떠나, 결국 올해 19명 증가를 기록했다.

지부와 파송 국가별 현황을 살펴보면, 중총공사 169명, 일본 52명을 비롯해 아시아에 261가정 476명을 파송했고, 태평양 54가정 96명, 유럽 26가정 50명, 러시아 33가정 59명, 아프리카 63가정 111명, 중남미 32가정 61명, 브라질 24가정 44명, 협력단체 및 특수 118가정 200명으로 조사됐다.

고신은 44국에 126가정 234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고신은 올해도 13가정 23명을 파송했지만 5가정 8명이 사임이나 은퇴로 선교지를 떠났을 뿐이다. 한 대륙별 현황을 살펴보면, 아시아 145명, 대양주 11명, 유럽 32명, 아프리카 22명, 미주 24명이다.

합정(총회장:서상기목사)은 34개 국에 9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8월부터 올 7월까지 2명의 선교사만 파송했을 뿐이라 아쉬움을 남겼다. 대륙별 파송현황을 살펴보면, 아시아 50명, 북미 중남미 17명, 중동 4명, 러시아 5명, 아프리카 6명, 유럽 8명, 호주 2명, 특수 6명으로 나타났다.

기성은 43개 국에 231가정 41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기성은 지난해 9월부터 지난 8월까지 16가정 29명을 새롭게 선교사를 파송했고, 그동안 쉬고 있던 10가정 18명을 다시 파송하면서 올해도 47명의 선교사를 파송, 선교에 대한 관심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4가정 27명이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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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5-01 (목) 11:04
홈페이지 http://www.chinam.org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4591    
한. 중 기독교 전파 비교
한. 중 기독교 전파 비교

장신대 학술대회서 공칭동 박사 강연해


청도시 사회과학원 교수이자 한-중 교류센터 주임인 공칭동 박사는 지난 23일부터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3회 국제학술대회 21세기 동아시아의 변화와 기독교의 역할'에서 '중국 기독교 전파의 '중국화'를 분석하여-중 한 양국에서의 기독교 전파의 비교' 라는 주제로 소주제 강연을 했다.

공 박사는 중국의 역사 및 문화적 전통과 서구적 가치관의 정신적 기초인 기독교 사이의 문화적 충돌, 그리고 근대 중국의 발전 과정에서의 중국과 기독교 간의 복잡한 관계들이 기독교 중국화의 장애 요인이라는 점을 지적한 후,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과 서양 국가들간의 상호교류를 높이 평가하면서 중국에서 기독교의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때, 중국이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깊이 연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공칭동 교수에 따르면, 기독교의 '중국화' 란 기독교가 중국 사회와의 상호교류를 통해 그 자체의 기본 특징은 견지하면서도 내용과 형식면에서는 중국적인 특색을 드러내도록 변모되어가는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일컫는다. 기독교는 중국에의 도입초기부터 중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중국이 기독교의 경향을 띠게 한 것과 동시에, 중국사회의 반작용으로 중국화의 추세 또한 지니게 된 바 있다.

먼저 공 교수는 20세기 중반 이전의 기독교의 중국화 과정을 돌아봤다. 명나라 이전에 경교(景敎)와 야리가온교(也里可溫敎)의 형태로 중국에 유입됐으나 곧 중국 전통문화에 묻혀버리고 말았던 기독교는 명나라 말기 마태오 리치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세력을 통해 다시 중국에 들어와 천주교와 중국 전통 문화, 특히 유교사상과의 결합을 추진하며 황제를 포함한 많은 중국인들의 호응을 얻으며 나름대로 성공적인 중국에의 정착을 이루었다. 19세에는 중국 농민계층이 서양 기독교를 받아들인 계기를 됐던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 홍수전은 기독교의 가치관 및 교의와 중국 전통 사상을 융합하여 배상제교(拜上帝敎, 중국어로 上帝는 하나님을 뜻함)를 창시하여, 민중들에게 하나뿐인 신, 곧 하나님 예수를 숭배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양 열강과 맺어진 일련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중국인들 사이에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조성되었으며, 그리하여 서양의 종교를 반대하는 농민 중심의 단체 의화단이 조직되는 등 기독교에 대한 반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기독교가 서양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수단이라는 인식이 점차 팽배해졌으며, 특히 1919년의 파리회담에서의 중국 외교 실패 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기독교 운동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 충격을 받은 서양교회는 그들의 선교 전략을 조정할 필요를 느끼게 됐고, 그리하여 1922년에서 32년 사이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의 중국화를 독촉하는 등 기독교는 자발적으로 중국 전통 문화 및 중국 사회의 대변혁에 적응하여 기독교 중국화의 지름길을 열었다.

중국 기독교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점차 외국 선교단체들과의 연계를 끊고 자치, 자율, 자양을 목표로 중국화의 길에 들어섰다. 1950년에는 중국 기독교 애국 지도자 오요종(吳耀宗) 선생을 대표로 하는 중국 기독교 인사 40여명이 '중국 기독교가 새 중국 건설 중 노력한 경로' 라는 선언을 통해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회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끊고 진정한 독립 발전의 길로 나아갈 것을 호소했으며, 그 후 1954년에는 중국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오요종을 1대 회장으로 삼는 중국기독교 삼자애(三自愛) 운동위원회, 57년에는 피수석을 제1대 주석으로 하는 중국천주교우애국회가 설립됐다.

1950년대 말기에는 중국 국내 좌파적 노선의 영향으로 중국 기독교회의 정상 활동을 간섭하기 시작했고, 곧 이은 60년대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신앙의 자유가 말살되어 예배당의 용도 변경, 성경의 방화, 목회자들의 강제 노동 징용 등의 사태가 벌어지며 종교활동이 전부 중단되고 종교 사업이 큰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시기 비록 교회 활동이 법적으로는 금지됐으나 각종 지하교회와 가정 모임이 번성하게 됐다.

중국 정부는 1976년부터 신앙 자유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중국 기독교회도 타국 교회와 상호 방문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에는 중국천주교단과 중국기독교협회가 창립됐으며 남경 금릉협화신학원 등의 신학원 및 신학 간행물이 번성했다.

중국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보며, 공 교수는 기독교의 현대 중국에서의 지속적 성장. 발전을 위해서는 기독교가 문화 평등 정신 및 상부상보의 정신을 지니고 중국의 정세에 적응하는 '중국화'를 추진해야 함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공 교수는 이상과 같이 기독교의 중국화 과정을 살펴본 후 기독교의 한. 중 토속화를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에 따르면, 중국과 한국은 모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나라로서 원래부터 도교, 샤머니즘, 불교 등의 고유한 종교 문화가 있었고, 기독교는 서양에서 처음 들어온 종교로서 그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기독교가 중국의 경우에는 기원 7세기 당나라 초, 한국의 경우에는 중국을 통해 기원 8세기에 전래됐는데, 기독교의 발전 양상은 두 나라에서 상이했다. 중국은 오랜 세월 뿌리 박힌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외래의 종교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중국 전통적 사상 및 문화와의 융합이 필수적이었기에 기독교와 같은 새로운 이교의 부흥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 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 원인은 기독교 전래 당시 한국에서는 유교 세력이 쇠퇴하고 샤머니즘이 다시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왜냐하면 샤머니즘을 신앙한 한국인들은 그들의 신인 하늘님이 기독교의 천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기독교가 중국에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 반식민지 반 봉건사회로 전환되어 서양 열강이 군사력으로 중국을 침략하는 틈을 타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중국 국정에 적응하고자 노력하며 기독교의 중국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기독교는 정신적인 아편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각각 1948년과 1949년에 건국되었고 건국 이후의 50 여년간 양국 기독교는 상승세를 탔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발전 추세를 중국 기독교가 따라올 수 없었다. 1945년 한국의 천주교 신자는 188,600명, 신교 신자는 30만명, 1948년 중국의 천주교 신자가 320만명, 신교 신자는 70 만명으로 양국 간에 별 차이가 없었으나, 그 이후 1980년대의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은 기독교 신교신자 1000여만, 중국은 기독교 신교 신자 500 만명으로 나타나, 한국의 경우 4명 중 한 명 꼴로 신교 신자인데 반해 중국의 경우에는 신교 신자가 전 인구의 1/100도 채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칭동 박사는 강의를 마치며, 개방한 민족과 문화는 다른 민족의 우수한 문명의 성과를 더 잘 수용할 수 있는 반면, 폐쇄적이고 자만하는 어리석음을 고수하는 문화는 다른 문화와 철저히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출처-크리스찬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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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5-01 (목)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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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4693    
중국을 위한 선교사 - 허드슨 테일러
중국을 위한 선교사 - 허드슨 테일러

열정적인 믿음으로 따돌림 받던 어린시절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5월 21일에 영국 요크셔주 반슬레에서 태어났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어린시절부터 복음적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5살때부터 어린동생들을 앉혀놓고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런한 그를 보며 그의 부모는 그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더욱 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허드슨은 11살이 되어 학교에 다니면서 믿음을 잃고 마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학교생활속에서도 평상시 자신의 믿음대로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가 학교에서 책상에 엎드려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친구들이 비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고 15살의 나이에 한 은행에 취직하였습니다.
그는 선배 동료들의 나쁜 영향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징계로 시력이 나빠져 실직하게 되어 무의미와 절망 가운데 하루하루 고통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허드슨의 부모와 누나의 기도로 마침내 다 이루었다 한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17살이었습니다.


선교에 대한 헌신과 중국선교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아서 남부럽지 않게 사느냐 하는데 온 관심을 쏟았던 그가 이제는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주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던 청소년 시기를 지나고 다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사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기본적인 훈련에 착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올바른 정신자세와 생활태도 그리고 건강한 몸을 위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잠과 음식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교회생활과 전도생활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중국어를 배우고 의술을 익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자 빈민촌으로 거처를 정하는 장막훈련을 하였습니다.


선교에 너무 열정적인 그를 보며 사랑하는 여인은 그의 청혼이 부답스럽다며 거절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중국선교냐 결혼이냐 하는 문제 앞에서 그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삶의 방향을 정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시험을 이겼습니다. 허드슨은 물질이 전혀 없는 형편에서 중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기도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임을 믿고 기도로써 물질을 공급받고자 하였습니다. 한번은 허드슨 테일러가 커다란 병원에 실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중국선교협회로부터 생활비를 부담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게을러지고 그만큼 중국선교에 대한 훈련도 안일해질까 두려워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마침내 허드슨이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약 다섯달간의 위험한 항해를 마치고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상해에서 자리잡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와 방불한 곳에서 불안감을 느꼈고 물가가 폭등하여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는 별수없이 누더기만 걸치고 거치처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서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고 심한 먼지 때문에 눈병까지 앓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땅에서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복음밖에는 희망적인 소식이 없다고 생각한 허드슨은 한차례의 전도여행이 끝나면 미처 쉴 사이도 없이 다음 차례의 전도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강행된 전도여행은 15개월동안 무려 10차례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중국어 신약성경 1천 8백권과 2천권이 넘는 전도 책자들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중국인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만큼의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26살이 되자 허드슨은 영적으로 스승이나 다름없는 윌리암 번즈 목사와 동역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내륙지방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때 노예 매매가 성행하는 광동성 산두지방에 위험을 무릎쓰고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 지방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 저녁 때 거처로 돌아올 때는 몸이피곤에 지쳐 다리를 겨우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댓시간 후면 다음날의 전도를 위해서 다시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이후 내륙선교의 Power Station이 된 영파지방에 옮겨온 허드슨은 파커박사를 동역자로 얻어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때 외국인 학살 계획이 세워져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영파에서 동역자 다이어양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생긴 난민들을 돕고자 무료 급식소를 열었으며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한 결과 현지인 동역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으로 일한 결과 결핵을 앓게되어 영국에 귀국하였고 여기에서 '중국의영적 수요와 요구'라는 논문으로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중국내륙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역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허드슨이 34살의 나이로 중국에 2차 전도여행을 갈때는 지망선교사 16명이 동행하였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1년만에 항주에 세운 교회당에 모이는 신자들의 숫자가 무려 1천 5백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개척지 양주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맏딸, 막내아들 그리고 헌신적인 동역자를 차례로 잃었으며 이 와중에 천진대학살 사건을겪었습니다.

그는 성경 여백에다 다음을 같은 기도문을 적어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앞으로 1백 명의 선교사들을 추가로 더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저로 하여금 주님의 큰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소서.' 그가 기록한 이 기도문이 기독교 신문에 기사화됨으로 영국인들 안에 중국 선교에 대한 관심의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가까스로 건강이 회복되자 45살의 나이로 다시 중국을 향해떠났습니다. 그는 중국선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자였습니다. 허드슨은 여러선교지역에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놀라운 진리를 깊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교사역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은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헌신으로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고 이렇게 하여 한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1천명을 넘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지방에 이르자 성문 위에서 금빛으로 '내륙 은인'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있었습니다. 그는 호남성에서 73살의 나이로 열정적인 전도자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KCM webzine MIR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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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5-01 (목)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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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3864    
◈◈ 중국인의 사고방식 ◈◈
◈◈  중국인의 사고방식  ◈◈



1) 국민성과 역사, 지리와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고찰


중국인은 예로부터 많은 특징을 가진 국민이었다.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자긍심이 매우 강하고, 제도보다는 인관 관계(關係)를 우선시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제도가 아닌 '關係'가 일을 한다는 말이 있다. 특히 중국인을 사귀려면 제일 먼저 " 신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서양인이 중국인을 비하시키는 데 주로 사용하는 말의 하나가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체면 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이 있다. 또 우리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의 이익과 관계가 없거나 친구 사이가 아니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인정이 많은 우리로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외적 환경이나 외모보다는 실력과 실용을 중시하며, 결과를 보고 판단한다.
중국의 역사와 지리는 그들의 국민성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쳤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들은 내란을 비롯해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당했다. 그래서, 쉽게 상대방에게 마음을 내어 주지 않는다. 그리고,(3)체면 중시 사상에서 설명이 있을 것이지만 역사적 배경에 의해서 명분을 중요시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이 널리 유포되었다. 역사에 의해 지배 계층은 근 만년 가까이 지배의 위 치에 있으면서 생긴 특성으로서 지배 계층은 귀족 의식, 예의 의식, 중화사상, 인내력, 절개를 중시하는 편이고, 피지배 계층은 전제정치 하에서 시달려 오면서, 농사나 자신들의 앞날을 전적으로 황제나 그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에게 의존함에 따라 일반 계층 은 소극적이고 체념적 성향을 지니며, 이기주의, 이치에 밝게 되었다.
지리도 그들의 국민성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걸 보면, 황허강 이북의 사람들은 정통 한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그래서, 한 예로 북경인은 학벌이 높고 권력욕 및 명예욕이 많으며 예의를 존중하는 편이다. 황허강 이남의 민족, 아니 양자강 부근의 민족 은 바닷가와 가까이 있어서 아주 무역이나 상업에 밝다. 한 예가 상해인인데, 상해인은 국제적인 감각이 발달되어 있으며, 머리 회전이 빠르고 실용적이며 외관과 디자인을 중시한다. 그리고, 산동인은 몸집이 크고 성격이 단순하며 사람을 사귈 때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일단 친구가 되면 의리가 변하지 않는다. 한편, 절강인은 계산이 빠르고 저축율이 높으며 추진력이 강하나 손해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는다.
사천 지방과 복건 지방은 험난한 산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개척 적이고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 서, 복건성은 원래 산악 지역에 거주하여 가난하지만 근면하고 부지런하다.
동북3성은 술을 좋아하며 성격이 직선적이고 적극적이다.

2) 관습


음식 문화에서 식사 초대는 최고의 호의이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으며, 초대에 참석시 주인과 안내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 예의 이다. 초대시에는 반드시 주인에게 감사 표시를 해야 한다.
우리 나라와 많이 다른 부분의 하나가 음주 문화와 흡연에 관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첨잔하는 관습이 있어 그만 마시고 싶을 경 우에는 잔을 엎어 놓던지 의사를 명확히 하는 것이 좋으며, 잔을 돌리는 습관은 없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곧 이미지의 실추로 인식된다. 담배는 중요한 사교의 수단이며 초면에도 자연스레 담배를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므로 비흡연자라도 예의상 상대방이 권하는 담배는 받는 것이 좋다. 이처럼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담배는 서로의 대화와 인사의 매개물로 간주하며, 담배를 돌려 피움 으로써 공유감과 소속감을 느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교통 문화에 관한 것으로는 우리가 책에서 보아서 아는 것으로 자전거가 있다. 이 자전거는 가까운 거리나 통근 수단으로 이용 하고 특히 북경의 경우 3명당 2대꼴로 소유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대중 교통 수단으로는 기차가 이용되고 있다. 항공의 이용 시엔 공항에서 직접 항공권 구하기는 힘드므로 여행사나 판매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3) 체면(面子)중시 사상


중국인과 대면 중에 특히 조심해야 할 점은 절대로 중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약점을 들추어 중국인의 목슴 만큼이나 중 시하는 "面子(미옌즈:체면)를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체면 중시 사고는 과거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향수 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평균주의 사고 방식에 의해 심화되었으며 각 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집단거주의 형성 등에서 찾 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체면 중심 사상이 왜 생겨났는지 잘 모르는데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주·춘추 전국시대를 통해 이 명분중심사상·체면 중심 사상이 발생하였다.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는 많은 무인들 은 천자를 옹립하는 목적으로 천자의 수호(守護)라는 명분을 외쳤다. 그리고, 그 후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계속 민중을 지키 고, 국가를 편히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명·청 시대에는 외세를 물리친다는 명분이 있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만 년 가까이를 지속해 온 그들의 사상 속에는 명분을 중시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4) 현세주의적 경향


중국인들은 세상 모든 일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인 개념까지도 인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 서양에서 취하는 태도와는 달리 편의주의적 이며 실용주의적이다. 중국의 민족성이 상식적이고, 중국인 들이 연구하는 학문은 실천 중심이라는 점은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및 공자, 맹자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5) 중화사상.


주(周)의 문왕(文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건국할 당시에는 호경을 수도로 하는 서주였으나, 주(周) 유 왕(瑜王)에 이르러 북방 민족에 의해 뤄양(洛陽)으로 수도고 천도함으로써 동주(東周)가 되었다.
중화사상이라는 말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이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세계에 퍼져 나간다고 믿는 중국의 민족 사상이다.
중화사상이라는 말은 <삼국지>등에서 처음 나타났다. 과거의 한족(漢族)은 이 사상을 통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해 왔다.
과거 한족이 황허강 유역에서 농경 생활을 하면서 문명을 개척해 나갈 무렵 그 주위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한족은 다른 민족과 접촉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발달시켰는데, 문화가 무르익은 서주(西周)시대. 중국은 자신을 중화(中華), 동쪽의 우리 나라를 동이(東夷), 서쪽의 민족을 서융(西戎), 남쪽의 민족을 남만(南蠻), 북쪽의 민족을 북적(北狄)이라 하였다.
에 이르면서 주위의 민족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선민(選民)이라고 믿었고, 굳건한 중화사상을 가졌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들은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天子)로 칭함으로써 우월 의식을 더욱 고취하였다. 중화사상은 그 배후에 이민 족을 천시하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華夷) 사상이라고도 한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진·한·당대에 이르러서는 중화사상이 극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문화유산이 충분히 그들이 중화사상을 가지게 끔하고 있는데 진의 만리장성, 한의 서역길(실크로드) 개척. 서역길은 한무제때 장건에 의해 개척되었다. 당시는 흉노 의 침입을 막기 위해 월지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을 파견했으나, 흉노에 의해 장건이 포로가 되고 17년간의 탈출을 시도해 성공한 장건의 이야기를 들은 한무제가 개척.
, 당의 세계 제국이 그것이다. 특히, 한과 당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서 한의 서역길 개척으로 동·서의 교역이 처음으로 이루어 져 로마의 사신을 받아들였고, 당의 장안은 당시 이미 백만을 넘어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으며, 종교 또한 국제적인 제국답게 다양한 종교. 네스토리우스교, 기독교, 불교, 라마교, 조로아스트교 등 거의 모든 종교가 유포되었다. 그들은 예교가 없는 이민족을 성인의 도에서 벗어난 금수로 취급했다. 그래서, 중국의 천자가 모든 이민족을 덕 화(德化)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6) 중국의 종교


중국인들은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에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1982년의 헌법에는 「어떠한 국가기관·사회 단체 또는 개인도 공민(公民)에게 종교의 신앙 또는 종교의 불신앙을 강제로 제압해서는 안되며, 종교를 믿는 공민과 믿지 않는 공민을 차별해서도 안된다.」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 이후 불교·회교·기독교(구교·신교)·도교의 각계대표들은 조직을 재건하고, 출판물을 발행하면서 종사자와 연구자를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중국의 종교를 크게 나누어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이 파생된 토착적인 원시종교, 과연 종교냐 하는 논란도 있지만 종교적 요소 및 색채가 뚜렷한 유교, 중국에서 발생한 유일한 종교인 도교, 외래종교인 불교·회교, 티베트의 라마교, 보다 후대에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 중국인의 종교관


중국인들의 종교관은 천지 우주간에 있어서 사람의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인에게 천인합일은 최고의 이상이며 인간이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보았다.
그래서 종교에서도 중심은 사람이다. 즉 중국에서의 종교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섬기는 것이 다. 앞의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뒤의 사람은 죽은 사람, 곧 조상인 셈이다.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조상은 가족과 죽은 자와의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늘 조상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 은 혹 병이라도 나면 먼저 조상의 위패부터 살피곤 했다. 위치가 잘못되었는지, 불효를 했는지를 반성했던 것이다.
인간간의 조화는 더 나아가 자연과의 조화로 안전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천(天)·지(地)·신(神)·귀(鬼) 등 초자연이 모두 해당된다. 특이한 것은 중국인의 귀신 관념은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데에 있다. 유가의 성현이든 도교의 신선이든, 아니면 불교의 보살이나 귀신 등은 모두가 인격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한층 밀접해지며 부탁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이 귀신을 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의 연장에 불과하다. 이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 수를 구세주로 받들면서 사람은 예배만 가능할 뿐 그 이상은 불가능한 것과는 다르다.
이처럼 중국에서의 종교란 조상, 즉 인간을 섬기는 종교가 일찍부터 뿌리를 내렸으므로 우리가 말하는 종교는 그다지 성행하지 않고 있다. 가장 성행했다는 불고도 그들이 주장하는 내세관이나 윤회론이 조상 섬기는 것과 흡사했으므로 수용이 가능했을 뿐이 다. 그래서 중국에서 기독교는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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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5-01 (목) 11:02
홈페이지 http://www.chinam.org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4773    
▒ 중국의 음식문화 ▒
▒ 중국의 음식문화 ▒




1) 중국인들은 왜 음식문화를 중시하는가?

중국의 음식문화는 5천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설립되고 왕조가 구축되면서 새로운 풍습과 음식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수천년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중화민족 문화의 한 부분으로 형성되어온 중국의 음식문화 안에는 중화인의 사상, 도덕관념, 민족심리, 생활방식, 신앙과 예절이 어우러져 있다. 중국에서는 衣食住 대신 食衣住 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일 정도로 중국인들은 식생활 향상에 가장 먼저 신경을 쓴다. 그러나 예로부터 중국인의 음식섭취 목적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장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의약과 음식은 본래 그 뿌리가 하나라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음식으로 몸을 보신하고 병을 예방하여 치료하고 장수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곰, 자라, 고양이, 쥐, 벌레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는 중국요리는 불로장생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해왔다. 또한 동북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다양한 민족구성은 중국요리가 다채로운 형태와 독특한 맛을 갖게 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중국인들의 식생활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여행도 재미있을 것이다.

2) 풍성다채의 음식과 요리법


중국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것 중에는 비행기, 땅위에 있는 것 중에는 자동차만 빼고는 다 먹는다' 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 식탁에 올려지는 요리의 재료는 종류가 많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대체로 色·香·味의 조화를 철저히 이루고 있는 중국요리의 비법은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첫째, 중국요리에 사용되는 재료는 광범위하면서도 재료 선택이 엄격하다. 상용되는 재료는 약 3천여종이고, 총 재료수는 1만종 이상이다. 재료선택 면에서도 주재료와 부재료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둘째, 칼질이 정교하고 모양이 다양하며, 크기, 굵기, 두께가 고르다. 어떤 재료는 칼질을 거쳐 살아있는 것과 같은 새, 짐승, 화초 등 아름다운 조각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요리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


셋째, 중국음식은 불의 강약과 시간조절에 따라 그 요리의 色·香·味가 크게 좌우된다.


넷째, 중국요리의 특징은 날것으로 먹지 않는데 있으며, 반드시 숙식(熟食)을 기본으로 한다.


다섯째, 양념의 배합을 중요시한다. 중국요리의 조미료는 백여종에 달하여 세계적으로도 첫 손가락에 꼽히고 다양한 조미료는 중국요리에 있어서 맛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관건이기도 하다.



3)중국의 대표요리


일반적으로 중국 음식의 특징은 '동쪽음식은 맵고, 서쪽은 시고, 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다' 라고 말한다. 지역마다 제각기 두드러진 특색을 가진 중국요리는 크게 산동요리, 강절(강서·절강) 요리, 사천요리, 광동요리로 분류하며, 그 밖에 북경지역 요리까지 포함한 각 지역별 요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중국의 요리의 특징 및 대표음식

1) 산 동 요 리
맛이 비교적 짜고 담백하며, 느끼하지 않다.
탕(湯) 종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탕추위(糖醋魚 : 탕수육과 같은 형태로 고기 대신 생선을 사용한 것임)
2) 사 천 요 리
혀를 얼얼하게 하는 독특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주재료는 육류이다.
위샹로우쓰(魚香肉絲), 꿍바오지딩(宮保鷄丁), 간사오즈위(乾燒?魚)가 유명하다.
3) 강 절 요 리
담백하고 신선하다.
조미료를 많이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초어(醋魚)를 재료로 하는 서호추어(西湖醜魚)요리가 유명하다.
4) 광 동 요 리
청담하고 입맛이 깔금하며 약간 달다
중국 내륙의 요리법과 서양의 요리법을 혼합한 요리 · 서차이(蛇菜 : 뱀요리), 롱후떠우(龍虎?)가 유명하다.
5) 북 경 요 리
베이징카오야(北京?鴨 : 북경오리구이)
쑤안양로우(?羊肉 : 매우 얇게 썬 양고기 조각을 물이 부글부글 끓는 화로 속에 넣고 살짝 데쳐서 양념에 찍어 먹는다) '?' 의 뜻이 데치다는 뜻.
* 중국음식은 요리이름에서 대부분 그 요리의 내용을 파악할수 있다.

4) 중국인의 주식과 주요 명절 전통음식


중국인의 주식은 쌀과 밀가루이다.
남방 사람들은 미판(米飯:쌀밥), 니앤까오(年?:중국식 설떡) 등과 같이 쌀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는 반면, 북방 사람들은 만토우(饅頭:소 없는 찐빵), 라오빙(烙餠:중국식 밀전병), 빠오즈(包子:소가 든 찐빵), 화쥐앤(花卷:둘둘 말아서 찐 빵), 미앤티아오(面條: 국수), 쟈오즈(餃子: 밀가루를 반죽하여 엷게 민 다음, 잘게 저민 고기나 야채 따위를 넣어 싼 것) 등과 같은 밀가루 음식을 즐겨 먹는다.
부식으로는 돼지고기, 생선, 닭, 오리, 쇠고기, 양고기와 채소, 콩으로 만든 식품을 위주로 하며, 주식과 부식의 조화와 영양의 균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아침을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밖에서 사먹는 것이 보통이다. 아침식사로는 요우티아오(油條), 지앤빙(煎餠)같은 밀가루 음식과 죽, 또우지앙(豆醬) 등을 주로 먹는다. 중국에서는 점심식사 시간이 2-3시간이나 되므로 직장과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집에서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저녁식사는 대체로 가족들이 함께 가정에서 식사를 한다. 또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대도시에서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식생활 문화에도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그 중의 하나는 대도시에 외식 산업이 성업 중인 것이다.
한편 중국은 설이나 명절이 되면 전통적인 고유음식을 먹는데 중국의 주요 명절 고유음식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주요명절 고유음식

춘절(春節)
(음)1월1일
지아오즈(餃子: 물만두)


정월대보름
(음)1월15일
위엔샤오(元宵: 새알심모양의 찰떡)


단오
(음)5월5일
쫑즈(綜子: 찹쌀을 댓잎 또는 갈잎에 세모나게 싸서 찐 찹쌀떡)



중추절
(음)8월15일
위에빙(月餠: 달처럼 생긴 떡과자)


섣달 초여드레
(음)12월8일
라빠조우(臘八粥: 여러 가지 종류의 쌀.콩.과일 등을 넣어 만든 죽)
또한 절기에 따라 입춘에는 봄 떡을 먹고, 입하에는 국수를 먹으며, 입동에는 훈둔(얇게 빚은 일종의 물만두)을 먹는 등 여러 가지 풍부하고 다채로운 음식관련 풍속이 있다.

5) 손님접대


중국인은 '하오커(好客)' 즉 손님 접대를 좋아한다.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중국인이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상대방과의 우의를 더욱 발전시키고 싶다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공석(公席)이나 직장단위의 정식 초청을 할 때는 초청장을 사전에 보내는 것이 관례이며, 일반적으로 사적인 자리는 전화로 알린다. 그러나 어떤 초청이든 하루나 이틀 전에 통보하는 것이 예의이다. 중국인들은 연회에 참석할 때 다른 나라와는 달리 복장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일반 가정에서 손님을 초청할 때는 상당히 신경을 쓴다. 우선 요리의 가짓수가 중요한데 홀수는 불길한 조짐을 의미하므로 차리는 요리가 아무리 많아도 이에 대해서는 꼭 신경을 써야 한다.
식사를 초대한 주인은 풍성한 식사와 좋은 술을 대접하는데 중국인들은 음식과 술을 적게 내놓으면 손님들이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손님에 대한 성의가 부족하다고 여기므로 질과 양이 풍성한 음식과 술을 손님에게 대접해야 한다고 여긴다.
식탁에서는 친절과 우의의 표시로 음식을 손수 집어 놔준다. 손님의 접시에 음식이 비었을 경우 주인은 좀더 드실 것을 손님에게 권하는 것이 예의이다.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실례이며,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담배를 서로 권하는 것도 친밀함의 표시이므로 피우지 못하더라도 권하는 사람의 성의를 최대한 존중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
먹는 순서도 중국요리에서는 중요하다. 대부분 냉채, 야채 볶음요리, 고기 볶음요리 순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며, 맛도 끝으로 갈수록 맛깔스럽고 고급인 경우가 많다.
주인은 손님과 함께 식사를 천천히 해야 한다. 손님과 함께 식사를 끝마치는 것이 예의지만 주인이 먼저 식사를 마치게 될 경우, 손님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다했습니다. 천천히 많이 드세요" 라고 말하며, 끝까지 동석한다.
또한 물고기 요리를 준비하게 되면 물고기의 머리는 항상 손님 쪽으로 향하게 한다. 또 생선을 먹을 때는 생선을 절대로 뒤집지 않는다. 이는 배가 뒤집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특히 연해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철칙처럼 통한다.
손님을 초대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술과 음료이다. 풍성한 요리와 술상을 차리는 것은 주객(主客)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식사 전에 요리와 함께 술을 먼저 마신다. 술잔에 술이 조금만 줄어들어도 중국인들은 가득찬 상태(滿)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시 따른다. 연회를 시작할 때는 일반적으로 乾杯(건배: 깐뻬이=원샷)를 하며, 때론 마치며 乾杯(깐뻬이)를 하기도 한다. 또한, 남은 음식과 술을 가져가는 경우는 초대한 사람을 무시한다고 여겼으나, 최근에는 많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출처: 인터넷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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