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션>을 너무 인상깊게 보았기 때문일까?
‘선교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숲이 울창한 밀림 속 마을에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장렬하게 순교하는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수많은 선교사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언제나 ‘극적인’ 상황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우리와 다름없이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친구와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소소한 일상을 배경으로 살아간다. 물론 그러한 가운데 현지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우고 때론 박해를 받기도 하면서 선교를 진행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삶을 보고 들으면서, 왠지 한국인 선교사의 삶은 분주한 사업가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보다는 일을 우선시 하고, 그 일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의해서보단 풍족한 자본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의 논리가 선교사들의 사역을 진행하는 논리로써 작용하고 있는 것을 포착할 때면 잠시 혼란스럽기조차 하다.
‘영혼구원’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과정은 어떤 논리에 의해 진행되든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함에도 선교지에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 힘쓰는 선교사의 열정은 간혹 사업가의 정열과 구분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선교사와 사업가는 무엇이 다를까?
얼마 전, 필리핀에서 살다온 한 청년의 이야기는 ‘바쁜 선교사’의 이미지를 더욱 명징하게 했다.
“그 곳은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이에요. 어느 날 밤, 누군가 저희 집 대문을 급히 두드리더라구요. 문을 열었더니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아저씨였어요. 그는 자신의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며 울먹이더군요. 그리곤 장례절차를 위해 교회를 찾아갔는데 교회문이 잠겨있다고 했어요. 참 난감하더라구요.”
죽은 아이의 아버지는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그 동네 교회의 목회자인 한국인 선교사는 주일날 하루 이 마을에 들어와 예배를 인도할 뿐 평일엔 도시에 나가 살고 있었다.
도시에서의 또 다른 사역 때문인지, 아니면 선교사 자녀의 교육 때문인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목회자가 교인들과 삶을 나누지 못하면서 건물만 번듯하게 지어 놓은 교회라면 과연 그 교회는 누구를 위한 교회일까.
이 씁쓸한 이야기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오늘날 한국인 선교사들이 일하는 사역지 곳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한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알려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닌,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케 하는 것이 ‘선교사’의 역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선교는 ‘삶’이 아니라, ‘프로젝트’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복음의 절대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분별력 있게 견지해야 한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곤 그 더운 나라에서 넥타이를 메고 땀이 젖어나는 발에다 구두를 신고 예배를 인도했다. 그래야 교인들이 더욱 정중하게 목회자를 대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 교인들은 그 곳의 관례대로 선교사를 “Mr. ○”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선교사는 한국에서처럼 자신을 “Paster ○”라고 부르라고 권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를 “파스터 ○”라고 불렀는데 그를 부를 때마다 킥킥거리며 웃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은 길을 가다 만난 여학생들이 선교사를 보고 배꼽을 잡고 웃더니 “당신은 점잖게 생긴 분이 어찌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냐?”라고 물어오기까지 했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그 곳 사람들은 “파스터”를 “마스터드(치사한 놈)”로 잘못 이해하여 그를 ‘목사’가 아닌, ‘치사한 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웃지못할 에피소드는 모 선교단체의 대표로 일하는 한 선교사의 실화인데, 어느 선교잡지에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그는 자신의 글을 이렇게 마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지극히 한국적인 문화와 사고 속에서 국제 단체에서 임하고 있다.”
이것이 비단 이 선교사만의 이야기일까. 수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도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와 문화를 고수한다.
물론 좋은 문화를 전해주고 정착시키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선별적 이식이라기보다 무조건 ‘한국적’인 것을 그대로 선교지에서 답습하는 경우가 더 많다.
목회자의 권위를 중시하는 한국교회의 관계에 따라 선교지에서도 현지인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려 하고, 현지어를 익혀 현지인들의 친구가 되려 애쓰기보단, 월급을 주고 현지인 통역자를 고용해서 ‘지시’를 내리는 일에 더 익숙하다.
물론 단일문화, 단일민족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이기 때문에 타문화권에 적응하는 것이 그 어느 나라의 선교사들보다 쉽지 않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지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없이, 가난한 현지인들의 삶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지난 세기 서양 선교사들의 과오를 또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생각할 때, 선교지에서 개척한 교회의 교인들에게 한국어로 된 찬송가를 가르쳐서 예배시간에 현지인들이 한국어 찬송을 부른다고 흐뭇해하던 한 선교사의 이야기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복음 전파’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교감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복음전파를 일방적인 ‘선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선교지의 현지인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알려고 하기보단 한국에서 그래왔듯이 일방적으로 ‘주입’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복음전파를 목표로 한다면 현지인에 대해 이해하고 우리의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그들의 것’을 배우고 그들의 삶 속에 복음이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선교사들은 현지의 토양 속에서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토양을 관찰하고 그것에 맞는 비료를 주기보단, 우리의 토양에 뿌리내린 복음의 나무를 그대로 옮겨 심으려는 습성에 젖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선교지에서 ‘복음의 절대성’과 ‘문화의 상대성’을 분별력 있게 견지할 수 있는 지혜가 바로 선교사들이 지켜야 할 과제가 아닐까.
선교사는 선교지라는 무대에서 주연배우가 아니다
남미의 에콰도르에서 1기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에콰도르에 갔을 땐 참 이상했어요. 이미 100년 전에 기독교가 전래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선교사자녀학교가 있고, 선교병원, 기독교방속국 등이 모자람 없이 세워져 있는 곳인데 왜 기독교인은 전체인구의 3%에 불과한지… 얼핏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1기 사역을 마친 시점에서 그는 의문점에 대한 답을 감지했단다. 프로젝트성 사역으로 일관했던 서양 선교사들의 사역이 토착교회의 지도자를 키우고 교회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너무 소홀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교회가 무너져 버린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그런데 이 귀중한 깨달음은 오늘의 한국인 선교사들 또한 곱씹어야 할 사항이다.
오늘날 수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선교사 파송수만 해도 전세계에서 3,4위를 다툴 정도로 한국은 ‘21세기의 선교 리더국’이라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8천여 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과연 선교지라는 무대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대개의 교회개척 선교사의 사역은,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주연배우를 연상케 한다.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을 모으고 교회운영을 독자적으로 담당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거의 전천후 선교사다. 물론 효율성에 있어서는 이러한 방식이 옳다.
그러나 시간이 더디고 힘이 들더라도 선교사는 자신이 무대 위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 한다. 무대는 ‘서투른 현지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그들을 지속적으로 훈련시켜 스스로 교회를 지탱해 갈 수 있도록 선교사는 무대 뒤에서 그들을 이끌고 돕는 연출자와 스태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선교사가 주연배우를 자처하면 나중에 그 무대는 선교사의 본국 귀환과 함께 막을 내려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현지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필요 없어 할 때, 그 때를 목표로 사역을 진행한다던 어느 선교사의 고백은 아름답다.
선교는 ‘누구든지’ 해야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떨치고 선교지에 나선 선교사들의 ‘헌신’은 귀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힘에 의지해서 현실과 싸워가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살아가는 삶을 선교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눌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선교’가 아닐까.
자칫 선교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것’을 고집하고,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성취감에 젖어 있다면 그것은 선교가 아닌, 선교를 표방하는 ‘사업’에 불과한 것이다.
498 기독교 복음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 네스토리안(Nestorians) 선교사들이 1350까지 터키스탄(Turkestan)에서 활약
520 시리아인 전도자(Nestorians)들에 의해 세일론섬(island of Ceylon)에서, 페르시안 주교 산하의 말라바(Malabar)에서, 간지즈강 유역에서ㅡ훈족(Huns), 터크족(Turis), 위거족(Uighurs), 중에서, 그리고 티벧(Tibet)과 수마트라(Sumatra)등지에서 수 많은 기독교 개종자 속출
523 유대인 아랍왕 두누와스의 박해로 아라비아의 나란(Najran)과 힘마(Himyar)지역에서 14,000명의 아랍 크리스챤들이 학살(Duh-Nuwas)
537 성소피아 성당 완공
540 저스티니안 황제(Emperor Justinian)의 명령으로 비잔틴제국 주변의 모든 야만족이 기독교로 개종, 소아시아의 7만명에게 강제로 세례
549 네스토리안 대주교가 중국 만리장성 북방 헤프탈릴(Hephthalites)지경의 백인 훈족에게(White Huns) 주교를 파송
563 콜룸바(Columba)가 스코트랜드에 복음전도
570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 메카에서 출생
590 교황권 확립(그레고리 1세)
596 그레고리대제(Gregory the Great)가 영국에 어거스틴(Augustine) 주교를 파송
597 켄트(Kent)족의 왕 에텔버트(King Ethelbert) 세례
622 헤지라(메카→메디나, 이슬람 원년)
626 동로마 성상숭배 금지
627 노텀부리아(Norbhumbria)족의 왕 에드윈(King Edwin) 세례
631 동 앵글(East Angles)족의 개종
635 네스토리아 선교회(Nestorian Mission) 중국 도착
637 롬바르드(Lombards)족의 개종
638 이슬람의 예루살렘 점령
640 북아프리카 650만 베르베르(Berbers)족의 80%가 기독교로 개종, 그러나 950년까지 전부 이슬람으로 다시 개종
685 윌 프리드(Wifrid) 영국의 기독교 개종을 완성
716 보니페이스(Boniface)의 장기선교역사 시작
723 도르(Thor)의 참나무가 쓰러짐
730 베데(Bede)의 『영구 교회사(Church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편찬, 앵글로 쌕슨족(Anglo-Saxon race)의 개종을 서술
732 마르텔장군 뚜르 쁘와디아 전쟁에서 승리(이슬람군 격파)
780 촬레마그네(Charlemagne)가 쌕슨(Saxon)족에게 강제로 세례, 그리고 세례거부자는 하루에 4천 5백명을 처형하고 수천명을 유형지로 추방
1556 세일론(Ceylon) 콜롬보(Colombo)부근 카레아스(Careas) 해안의 어부 7만명을 천주교로 개종, 1583년까지 마나르(Marar)섬에서 파라바족(Paravas)과 카레아족 등 지주조개 잡이 어부들 가운데 4만 3천명의 기독교인
1564 어거스틴교단(Augustineians)의 필리핀 도착
1580 페루의 제수잇(Jesuit)교파 신학자 호세 드 아코스타(Jose-de Acosta 1539-1600)가 <미개인 복음전파>(On the Preaching of 혿 Gospel Among the Savages)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아메르 인디안(Amerindian)종족 전도의 문제점을 제시
1583 마테오 릿치(Matteo 꺛챠)dml 중국 도착
1588 영국교회(Anglican) 교구목사 하드리안 사라비아(Hadrina Saravia)가 최초로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
1593 프란시스코 교단(Franciscans) 일본 도착
1602 네덜란드 정부가 동인도제도의 말레이족(Malays)을 개종하기 위한 선교사 파송
1606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의 마두라(Madura) 도착
1614 일본에 반기독교 교서 공포
1622 교황 그레고리 15세(Gregory ⅩⅤ 1554-1623)가 「신앙전파를 위한 신성회중」(C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을 설립
1629 마태복음이 말레이어(Malay)로 번역, 이는 비서구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건
1649 「뉴잉글랜드 복음전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가 설립되어, 아멜인디언(Amerindian) 선교를 위해 죤 엘리옷(John Eliot)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1650 러시아 정교회가 버링 스트레잇종족(Bering Strait) 선교를 위해 시베리아(Siberia)를 횡단
1663 져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an Weltz 1621-1668)가 독일교회와 학생들의 세계선교에대한 각성을 촉구
1664 폰 벨츠(Von Weltz) 문제가 선교의 필요를 언급하다
1667 영국 시인 죤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저서 「실락원」에 [만민에게 복음을!]이란 구절을 사용
중국에는 넓은 지역만큼이나 다양한 방언들이 존재한다. 방언이란 중국인구 90% 이상을 사용하는 한족의 지방언어를 뜻한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방언에 포함되지 않는다.
현재 가장 넓게 쓰이는 언어는 표준어인 베이징어로 전체인구의 약 69.4%인 8억9000만명이 사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타이완에서도 방언으로 널리 쓰이는 푸젠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1억명 정도로 8%를 차지하고 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사용되는 상하이어와 홍콩의 광동어는 각각 7%와 5.5%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중국어는 중국에서 93%이상 차지하고 있는 한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가르킨다. 이 한어를 청나라 때는 관화(관에서 쓰는언어), 서구인들은 만다린이라 하엿으며 대만에서는 국어라 부른다. 1956년 이후 중국에서는 이를 보통화라고 부르고 있으며 화교들은 화어로, 우리나라와 일본은 중국어라 부른다.
그러나 중국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서 지역별로 많은 방언이 있다. 예로부터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사람들이 만나면 중국인끼리의 대화에도 통역이 필요하다는말을 들은적이 있을것이다. 이렇게 통역을 필요로 할 정도의 방언으로 일곱개의 방언이 있다.
보통화의 모태가 되는 북방방언,상해어로 대표되는 오방언,상방언(호남어),공방언,객가방언, 민방언(복건어),오방언(광동어)이 이들이다.
나머지는 여기서 파생되는 방언이 있는데 이ㄷ릉느 거의 위의 일곱개방언에서 지방적 특성이 가미된 차방언이다. 한가지 주의해야 할점은 북경에서 듣는 발음이 정확한 표준어인 보통화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즉 북경어는 북경사투리에 가까운 것으로 혀를 심하게 말고 부ㅎ분명한 연속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표준어인 보통화를 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중국은 땅이 넓고, 민족이 많은 만큼 언어도 다양하다. 중국의 방언학 연구를 보면 기원전후에 벌써 방언학 연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년 양웅이 [방언]이라 책을 저술하였다. 이책은 서양 방언연구보다 천여년이 앞서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중국이 고대로부터 많은 다양한 방언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볼수 있다.
중국의 여러 방언들은 중국의 기타 소수민족의 언어와 다르게 그 어휘, 어음, 문법등이 중국어의 범주에 속하고 있어, 다른 지방사람들 간에 의사소통시 비록 그말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국어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방언들은 각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고 있어 각 지역마다 그 말을 들을 때 받는 느낌이 모두 다르다. 동북지역의 방언은 억양이 세고, 딱딱하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고, 북경방언은 다른 지방언어와 비교해 볼 때 정중한 느낌을 풍기며 얼화인(특정단어 뒤에 붙어 두 개의 음절을 한 개의 음절로 소리나게 하는 발음)이 많은 게 특징이다. 산서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듬직하고 다부진 맛을 풍기게 하고, 광동말은 활발하고 소주말은 부드럽고 애교티가 많이 풍기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중국인들사이에 이런 다양한 방언의 특징을 반영하는 말로 "영파 소주사람들이 싸우면서 한는 말은 기꺼이 들을 수 있어도 영파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은 들을 수 없다"란 말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소주사람들의 말은 부드러워서 싸움을 하더라도 싸우는 것 같지 않고, 영파사람들의 말은 딱딱하고 억양이 세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더라도 싸우는 것 같아 듣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중국에 표준어가 없다면 서로 의사소통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각 지역 방언간에 차이가 심하다.
중국어는 대체로 아래의 일곱가지 방언으로 분류할 수 있다.
北方方言: 北方方言은 중국어 표준어 형성의 기본바탕으로서 분포지역이 넓고 사용인구수가 많다. 대체로 한족인구의 73%를 차지한다. 북방방언은 다시 네가지의 방언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다.
1. 화북, 동북방언
분포지역은 주로 북경 천진, 하북, 하남, 산동, 요녕, 길림, 흑룡강, 그리고 내몽고 일부지역이다.
2. 서북방언
주로 산서, 섬서, 감숙, 청해, 영하, 내몽고 일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3. 서남 방언
분포지역은 주로 사천, 운남, 귀주, 호북성대부분, 광서성 서북부, 호남 서북쪽 지역이다.
4. 강회방언
주로 안휘성, 강소성의 장강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吳方言: 분포지억은 주로 상해시, 강소성의 장강이남 지역이다. 전형적인 오방언은 소주지방 언어가 그 대표이다.
湘方言: 주로 호남성 대부분에 분포되어 있고 장사지방의 언어가 그 대표가 되고 있다.
간방언: 강서성의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간방언은 남창지방의 언어가 이를 대표하고 있다.
객가 방언: 광동매현의 말이 그 대표로 되고 있고, 주로 광동 동부, 북부, 복건성서부, 강서성 남부와 광서성동남부가 그 주요 분포지역이다.
민방언: 주요 분포지역은 복건성, 해남성의 대부분 지역, 광동성 동부, 뇌주반도의 부분지역, 절강남부의 온주지역의 일부분, 광서성의 일부지역과 대만의 한인거주지역이다. 민방언은 또 민동, 민남, 민북, 민중, 부선등 다섯가지의 갈래로 나누어 진다.
월방언: 월방언은 광주지방의 말을 대표로 한다. 주로 광동성 동부, 서남부와 광서동부, 남부의 백여개 현에 분포되어 있다.
위의 일곱가지 방언을 표준어와 비교해보면 민방언과 월방언이 표준어와의 차이가 가장 많은 말이고, 상방언과 감방언 객가방언이 그 다음이다.
대만의 '장개석국제공항'에 도착하면 안내 방송에 "장카이섹"이라는 말이 나온다. 장개석을 普通話로 말하면 "쟝쩨쓰"라고 하는데 왜 그들은 "장카이섹"이라고 하는가? 이는 사투리의 독음 차이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蔣介石은 浙江省사람인데, 어려서부터 고향말로 불리었던 그의 이름이 그대로 전국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香港을 "Hong Kong"이라 부른다. 이를 普通話로 말하면 "XiangGang"이 된다.
본시 香港은 廣東省에 속한 지역으로 현지인들은 廣東말로 "횡꽁"으로 부르는데, 영국인들이 영어식으로 부르는 과정에 음운상의 수정이 가해져서 "Hong Kong"으로 불리 었고 또 그렇게 외부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미국의 China Town과 같은 해외중국인집단거주지역에서, 화교들 사이에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중국어를 배운 사람이 해외에서 화교를 만나 반가운 나머지 중국어를 했는데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는 경험담도 있다. 이는 화교들의 출신지가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들의 언어도 각기 다른 사투리기 때문이다.
중국이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중국의 사투리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는 편이 아니다. 중국 사투리의 양상은 우리나라와는 크게 다르다. 우리의 사투리는 일부 소수의 어휘적 현상을 제외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단지 지방적 특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국의 사투리는 '方言', '次方言'이라는 등급을 매겨 논할 정도로 비교적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사투리는 漢族언어의 큰 갈래로, 이들간에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서 일상적인 대화마저도 통역이 필요하다. 동일方言이라도 그내부에서 지역적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런경우의 언어들을 '次方言'이라고 한다.
次方言은 대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나 지방적인 특징이 드러나는 것들로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사투리가 이런 등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方言은 통상 北方方話(官話), 扈方言(上海말이 대표), 湘方言(湖南語), 方言, 客家方言, 方言(福建語), 方言(廣東語)의 7종으로 크개 나눠 七大方言이라 칭한다.
이들간의 차이는 스페인말과 이탈리아말 혹은 스웨덴말과 노르웨이말 사이의 차이보다도 크다. 이중 현대 普通話는 北方方話이 모태가 돼 제정된것이다.
北方方話을 官話라고 하는 것은 이 사투리가 明,淸代 이래로 官界의 통용어로 사용된데서 연유한다. 이 사투리의 영어식 명칭 "Mandarin"은 본래 Latin계통의 말인 포르투갈말 "Mandar"(명령하다), "Mandarin"(관리)에서 유래한것이다.
중국 본토 이외 지역의 중국어는 廣東語와 福建語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는 해상교통이 편리한 廣東語,福建語 등 동남해안주민들의 해외진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멀리는 미주대륙에서 가까이는 동남아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본토 이외의 화교들과 상업활동을 하려면 廣東省,福建省 등 남쪽사투리를 아는것이 유리하다. 우리들이 더러 들어서 알고 있는 "Cantonese", "Fukenese"는 바로 "廣東省", "福建省"의 영어식 명칭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화교들은 절대다수가 山東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이들의 말은 北方方話의 次方言인 山東語이다. 사투리에 대칭되는 것을 "普通話"라고 하는데, 흔히 중국의 표준말은 北京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北京말과 普通話는 차이가 있다. 普通話는 北京말을 근간으로 하나 사실상 普通話는 정제된 北京말, 즉 北京말의 토속적인 성분을 배제한 것이다. 이는 공연히 까다롭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北京거리에서 마주치는 토박이들과 대화를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北京토박이들은 혀를 심하게 말면서 말하기 때문에 연속발화중 상당히 많은 부분을 불분명하게 우물거리는 특징이 있다. 또 北方方話지역에서 사용하지 않는 어휘도 적지 않다. 北京토박이들도 평소 자신들의 말이 普通話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평소 친구나 가족들과는 北京토박이말을 하나 공공장소에서는 의식적으로 普通話에 가깝게 말을 한다. 이는 학력이 높거나 문화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현저한 현상이다.
우리가 중국어라고 부르는 말을 현재 중국에서는 漢語라고 한다. 중국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언어는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므로 언어의 명칭과 민족의 명칭은 거의 일치된다. 단일 민족 국가의 경우, 언어의 명칭과 국가의 명칭 역시 일치되나 다민족 국가의 경우 언어명과 국가명은 일치될 수가 없다. 중국에서는 90%이상의 다수를 점하는 漢族의 언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데 이 공용어를 앞에서 말한 배경에서 공식적으로 漢語라고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中國語라고 하기도 한다. 현재 중국의 표준말은 普通話라고 한다.
중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普通語를 제정하기 전에는 官話라 하는 명칭의 북방 방언이 가장 널리 통용되었다. 중화민국 초기 시절 官話에 근간을 두고 있는 말을 정식 普通語로 제정하고 그 명칭을 國語라 하였으며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옮겨간 후에도 그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중화민국 초기에 정한 國語라는 명칭은 우리가 한 나라의 언어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국어와는 다른 개념으로서 표준어의 의미라 하겠다. 이 國語란 명칭은 현재 香港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인다.
또 華語라는 명칭이 있는데 이는 주로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의 화교 사회에서 쓰는 명칭이다.
이 곳의 화교들은 華人이라 하는데 이들의 언어라고 하여 華語라고 한다. 이들 동남아 화교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남방 지역에서 진출한 사람들로 중국의 남방 방언이 우세하나 상호 의사 소통을 위해 중국 본토의 普通語를 표준말로 삼고 있다. 사용 배경이 달라서 상호 부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普通語, 國語, 華語는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이들간의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國語」는「國之語言」,또는「國之語音」의 준말로「나랏 말」이다.훈민정음(訓民正音)서문에「나랏 말미 중국과 달라…」(國之語音,異乎中國…)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디 國語는 좌구명(左丘明)이 쓴 역사책에서 유래한 것으로「國史」를 뜻했다.그는 좌전(左傳)도 썼는데 미진한 데가있자 종전의 편년체(編年體.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함)를 탈피하고 나라별로 기술했다.
곧 주(周),노(魯),제(齊),진(秦),정(鄭),초(楚),오(吳),월(越)등 당시 춘추시대 8개국 4백50년의 역사를 완성하고는 國語라고 명명했다.「여러 나라의 말」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그가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語」자를 붙인 까닭은 제왕이나 신하들의 가언선어(嘉言善語.훌륭한 말)를 위주로 엮었기 때문이었다.
國語가 현재의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선비족(鮮卑族)의 북위(北魏 또는 後魏.386~534)때부터다.남북조(南北朝)를 잠시 통일한 북위는 중국의 언어장벽에 부닥쳐야 했다.그렇지 않아도 방언이 심한데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알아 들을리 없었다. 그래서 표준어를 정해 國語라 하고는 교육시키게 되었는데 알고 보면 선비족의「오랑캐 말」인 셈이다.
그뒤 國語의 개념은 왕조에 따라 바뀌어 원나라 때는 몽고어,청나라 때는 만주어를 각기 뜻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우리와 중국.일본 모두 國語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는 제각기 다르다.한 단어가 이렇게 달리 쓰이기도 드물다.알고보면 國語는 거대한 국가적 방언인 셈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漢字를 사용한다. 象形文字(상형문자)를 기초로 해서 會意(회의), 形聲(형성)문자로 발전하였으며, 이 중 형성문자가 주류를 이룬다.
한자는 그 복잡성 때문에 사용하기에 불편하다는 문제가 있어 56년 이후 중국에서는 일부 한자를 간소화 시킨 簡體字(간체자)를 正字(정자)로 규정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2225자의 간체자가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어는 한족이 사용하는 한어를 가리키는데 4가지로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성조가 있어 음악적으로 들린다.
중국 정부는 한어의 표준어를 규정했는데 이에 의하면 표준어는 북경어음(北京語音)을 표준음으로 하고 북방언어를 기초 방언으로 하며 규범화된 현대 백화문(白話文) 저작을 문법 규범으로 하는 '보통화(普通話)'라는 것이다. 58년부터 '한어병음방안'을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알파벳 자모를 차용하여 중국음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방언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대개의 방언은 한족언어에서 갈라져 나왔으나 대화를 할 때에는 중국인끼리도 통역을 내세워야 할 만큼 의사소통이 안된다.
북경어 사용은 약 70%정도이며, 소수언어로는 광동어, 상해어, 소주어, 복건어, 위구르어 등이 있고
소수 민족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권리를 보장 받는다. 그럼에도 중국민의 문맹률은 약 15%로, 티벳지방이 60%로 가장 높고, 감숙성, 귀주성, 운남성 순으로 비율이 높다 (1996년 샘플조사, 출처 : 중국통계연감 )
대부분 도시의 교육기관 및 공공기관에서는 보통화를 사용하고 주민끼리는 해당지역의방언을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장기체류할 목적으로 방문할 때에는 해당지역의 간단한 방언을 알아두는 것도 친밀감을 증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아래는 중국어의 이해를 돕기위해 2000.6.26일자 "emag21(emag21.com)"에서 원문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외국어를 완전한 자기 나라 언어로 만드는 데 귀재이다. 물론 한자가 뜻글자이기 때문에 음을 빌리는 동시에 뜻도 알맞게 붙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름 붙이기 아이디어는 이미 많은 세계인을 감탄하게 하고 있다.
우선 가장 유명한 코카콜라부터 보자.(괄호 안은 중국 발음과 한자의 뜻) 可口可樂 (커커우커러) 입맛이 좋아서 즐겁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글은 소리 글자이므로 '코카콜라'라는 소리를 내게 하는 기능에서 끝나고 이 단어에 더 이상의 뜻을 담을 수가 없었지만 중국인들은 마치 제품명에 광고 카피를 담고 이름 자체로 판촉 활동을 하는 것 같다. 다른 음료수들도 질 수가 없었겠지.
펩시콜라 - 百事可樂(바이써커러 : 백 가지 일이 다 즐겁다)
환타 - 奔達(풘다 : 향기로운 근대-식물 이름)
스트라이프 - 雪碧(슈에삐 : 희다 못해 푸른기가 도는 맑고 시원함)
7Up - 七喜(치시 : 기쁨이 7개나 되니 마냥 즐겁다)
코코아 - 可可(커커 : 그래그래) 이 정도이다.
청량 음료가 시원하거나 마셔서 즐겁고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 기능은 확실히 다한 셈 아닐까.
이왕 알아 보는 김에 중국의 외래어 만들기에 대해 더 알아보자. 중국에도 역시 패스트 푸드 바람이 거세게 불어 맥도날드니 켄터키 치킨이니 하는 음식점엔 연일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인들이 외래어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음을 빌고 해당 물건의 특색을 최대한 담은 글자로 구성하는 방법과 아예 외국어의 뜻을 번역하여 한자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경우에 핫도그나 햄이 해당한다.
이왕 발음에 맞게 글자를 고를 때 알맞는 뜻, 좋은 뜻을 고르는 게 상식인데 최근에 생긴 까르푸 (家樂福)은 또 다른 히트작 중 하나이다. 내 집에 즐거움과 복을 가져다 주는 쇼핑센터인데 아니 가고 배길까. 또 중국인 복(福)에 특히 약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은 외래어를 만들 때 가능한 한 발음만 들어도 그 물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아직도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 많지만 그들에게도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려 줘야겠기에 그렇다.(사실은 그들에게도 물건은 팔아야겠기에 그렇다.)
대표적인 예가 이런 것이다.
켄터키 치킨, 肯德基, 발음은 '컨더지'이다. 그런데 맨 끝의 '지'의 발음이 닭을 뜻하는 鷄자의 발음과 같다. '긍정하다'의 뜻을 가진 '肯'자와 '덕망'의 뜻인 '德'자, '기초, 바탕'의 뜻을 가진 '基'자로 만들어진 단어로 뜻은 좋지만 닭과는 상관 없는 글자들이다. 그러나 중국인이면 누가 들어도 닭으로 만들어진 음식임을 알 수 있다. 왜? 발음이 닭의 뜻을 가진 '지'로 끝나기 때문이다. 중국 외래어는 아니지만 닭 鷄자의 발음이 '지'라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럼 닭고기로 만든 중국 요리인 '깐풍기'나 '라조기'는 왜 '지'가 이니라 '기'인가?이들의 한자는 '乾烹鷄, 辣椒鷄'로 중국 보통어 발음으로는 '깐펑지, 라쟈오지'이다.鷄자를 '지'로 읽지 않고 '기'로 읽는 건 산동성 사투리이다. 개항 이후 우리 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와 중국 요리를 보급한 사람들이 인천과 가까운 산동성 사람들 이었던 때문이다.
다시 중국 외래어로 돌아가자. 또 우리가 얼핏 보기엔 중국인이 만든 외래어의 발음이 이상한 것 같지만 본토 발음을 잘 들어보면 오히려 중국 발음이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외래어 발음이 다 맞는 것이 아니니 중국 발음이 이상하다고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중국인이 사용하는 서양의 도시 이름들을 열거해 보자.
베를린 - 柏林(버어린) 카이로 - 開羅(카일루오)
프랑크푸르트 - 法蘭克福(파란커푸)
런던 - 倫敦(룬뚠)
뉴욕 - 紐約(뉴위에) 싱가폴 - 新加坡(신쟈포)
터론토 - 多倫多(뚜어룬뚜어)
그런데 東京은 그냥 '동징'인데 서울은 漢城이다. 서울의 한자가 없는데 서양 지명처럼 음으로 따오지 않고 굳이 한자를 찾아 옛 이름인 漢城을 쓰고 있다. 한국은 한자 문화권이니 우리는 지금 쓰지 않는 이름인데 자기네 맘대로 써도 된다는 것일까?
어쨌든 중국에서 우편물이 오면 서울대학교도 漢城大學校이고 한성대학교도 漢城大學校여서 무지하게 헷갈릴 것같다.중국에 가면 가끔 느끼는 바 중국인들은 우리가 쓰는 한자나 한자어를 우리말화한 또 별개의 언어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같다. 마치 한국인의 상당수가 자기네 나라 말을 배우고 있다는 우월적 착각에 사로잡히는 듯하다.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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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소식홈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영혼을 주님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