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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6-01 (일)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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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1088    
올바른 기독용어
Ⅰ. 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 →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제86회 / 2001년)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 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 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제86회 / 2001년)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제86회 / 2001년)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제86회 / 2001년)

5.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제86회 / 2001년)

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제86회 / 2001년)

7.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 등도 나올수 있기때문이다.
(제86회 / 2001년)

Ⅱ.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8.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본 교단 1998년 총회에서 통과된 표준 예식서에는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9. 성가대 → 찬양대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를 최근에 ‘성가대’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聖歌隊)’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10.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시킨 바 있는 본 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보아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11. 대예배 → 주일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제86회 / 2001년)

12.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젊은이 예배” 혹은 “찬양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13. 예배봐준다 → 사용불가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수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제86회 / 2001년)

14. 준비찬송 → 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제86회 / 2001년)

15. 예배 / 예식 / 기도회 → 구별사용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모인다.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를 통과한 「표준예식서」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주일예배, 주일저녁 찬양예배, 교회학교(주일학교)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경건회(각종회의시작 전)
(제86회 / 2001년)

16. 헌금 → 봉헌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제86회 / 2001년)

17. 축제 → 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이가원과 임창순의 ?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놓고 떠들고 소리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축제→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부활절 절기 행사, 성탄 축제→성탄 축하 행사 등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18.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Ⅲ. 장례와 관련된 용어

19. 소천(召天)하셨다. →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위로를받으시기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1.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제86회 / 2001년)

22. 칠성판(七星板) → 고정판 또는 시정판
우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으나 아직껏 가정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으며 그 때마다 목회자가 직접 시신을 다루는 일이 많다. 이때 시신이 반듯하게 굳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널빤지를 시신 밑에 깔고 손발의 위치를 반듯이 잡아 준다. 여기에 사용되는 널빤지 사용의 전통적인 관례가 이 널빤지에 북두칠성을 본 따서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여 ‘칠성판’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 교회에서도 적당한 이름을 못 찾아 ‘칠성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 ‘고정판(固定板)’ 또는 ‘시정판(屍定板)’으로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3. 영결식, 고별식 →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제86회 / 2001년)

24. 삼우제(三虞祭) → 첫 성묘(省墓)
우제(虞祭)란 장례를 마친 뒤에 지내는 제사로서 우리의 장례문화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의 제사는 세 번 갖게 되는데 그것을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 한다. 이 중에 아직도 삼우제라는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의 삼우제는 장사 지낸 뒤 3일 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관례로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다.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본 교단의 표준예식서에는 삼우제라는 이름을 ‘첫 성묘’로 부르도록 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제86회 / 2001년)


Ⅳ. 회의와 관련된 용어

25. 고퇴 → 고퇴 또는 의사봉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 ‘고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 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있는 은으로 띠를 띤 견고한 ‘마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토록 대한장로교 노회의 마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 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합하여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하였고, 이것을 길선주 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으로 지어졌고,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하여,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 만을 ‘고퇴’라 부르고 그 외에는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제86회 / 2001년)

26. 자벽 → 지명, 임명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버린 말을 교회가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벽(自?)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는 <수교집록(受敎輯錄)> <조선철종실록(朝鮮哲宗實錄)>에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함으로써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정서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대체로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 또는 ‘회장 지명’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27. 증경 → 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제86회 / 2001년)

28. 휘장 분배 → 꽃 증정
총회나 노회에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 ‘휘장 분배’라는 순서를 갖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점차 이를 생략하는 추세이지만, 역대 회장들과 주요 임원들이 일제히 단상으로 올라가 도열하면 이어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등장하여 임원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표지(標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해진 영어 단어로 ‘배지(badge)’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 초반에 원로회원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자 배지 대신 가슴에 꽂아 드리는 꽃은 결코 휘장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순서 또한 매우 형식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분배(分配)’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분배는 고르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므로, 원로들에게 표지를 고루 나누어주는 순서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이 순서를 사용하려 한다면 ‘꽃 증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제86회 / 2001년)


Ⅴ. 교회생활과 관련된 용어

29. 당회장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예배순서를 실은 주보나 교회 게시판에 당회장 ○○○ 목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모두 ‘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 또는 ‘담임목사’로 부름이 타당하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 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제86회 / 2001년)

30.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31.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라는 용어를 ‘부활절 절기행사’ ‘성탄 축하행사’ 등으로 바꾸어 써야 할 필요성을 밝혔으므로, 부활절 전날 밤에 갖는 행사도 당연히 ‘부활절 전야제’ 대신 ‘부활절 전야 축하행사’라고 불러야 한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보름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의 전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축하의 행사를 펼치기에 적절했었다.
성경에는 어떤 행사에서 전야에 모여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에서는 부활이나 성탄처럼 새벽에 이루어진 일을 축하하기 위한 전야 행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전야제’ 대신 ‘전야 축하행사’라고 하여 제사의 성격을 배제하고, 밤 깊은 시간까지 축하한다는 순수한 의미를 담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32. 사모 →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목사가 자기 부인을 가리켜 사모라고 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잘못 된 것이다. “우리 집 사모는 다녀왔지요.”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제86회 / 2001년)












87회

1.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 또는 죽은 사람을 가리켜 “천당에 갔다.” 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천당’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물질로 된 유형의 집 또는 공간으로 이해하기 쉬운 천당의 개념이나 서술이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 땅의 종교 문화를 형성한 타종교에서 유래된다. 한민족의 일반적인 종교개념이나 사전적 풀이에서는 천당을 “하늘 위의 신의 궁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인 정토(淨土), 즉 깨끗한 국토, 곧 부처와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천당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천당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즐겨 쓰는 ‘천당’이라는 어휘보다 한글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이 온전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하늘나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2. 입신(入神) ⇒ 사용불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기도하는 열심은 매우 소중한 특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한 기도생활은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각각 달리 경험하게 한다. 그러는 중에 여러 형태의 은사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학적인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기도원 등에서 기도에 집중하다가 “입신(入神)”을 했다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입신(入神)이란 무속종교의 표현으로서 무당에게 신이 내려 인간으로서의 자아의식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전에서는 입신(入神)을 한 인간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신의 경지에 이름” 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표현은 천주교가 주로 사용한 공동번역의 민수기 11장 25~27절에서 유일하게 사용했을 뿐 본 교단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영을 내리실 때” 또는 “영이 임하실 때”로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 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입신(入神)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제87회 / 2002년)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기도하는 중에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제87회 / 2002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룻記書, 욥記書, 箴言書, 雅歌書 등으로 말하거나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記, 言, 歌 등이 있어 ‘書’ 자가 의미상 과잉표현(redundancy)이 되므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創世記’ 나 ‘출애굽記’ 에 ‘書’ 자를 붙여 ‘創世記書’로나 ‘출애굽記書’로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啓示綠’에 ‘書’ 자를 붙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말 성경이 바로 쓰고 있으며, 같은 한자를 중국어나 일본어 성경 책명에서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제87회 / 2002년)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많은 사람이 시편의 장 절을 나타낼 때, 시편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몇 장과 몇 절은 산문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의 구분을 신?구약의 다른 책의 구분을 나타내는 ‘장’ 과는 달리 ‘편’을 쓰는 것은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이나 일어 성경에서도 우리나라와 같다.(제87회 / 2002년)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하나님의 몸 된 교회’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와의 관계에서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온 몸의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과 같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교회론의 한 단면이다. 그는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결합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천명하고 있다.(엡 1:20~23) (제87회 / 2002년)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설교를 할 때 흔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는 이가 그 동사 ‘사랑하시는’의 주체가 될 때에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존대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때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도, 그 ‘사랑하시는’이란 동사의 주체를 말하는 이 자신을 가리키는 뜻으로 말하는 경우라면, 즉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경우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의미는 흔히 ‘사랑하시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말하는 이(화자)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라 해야 분명하다.(제87회 / 2002년)

8.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예배로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예배시에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단순히 외는(외우는) 것, 즉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뜻을 바로 새기면서 음송(吟誦)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표현은 “다같이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다같이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도 그와 같은 경우로서 옳지 않다. 즉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주기도문을 외운다”라는 표현이나 “사도신경을 외운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주기도나 사도신경을 진지하게 뜻을 생각함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소리내어 외는 행위이다.(제87회 / 2002년)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단 한 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 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계시고 성육신 이전에도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중보자이셨다.(요 1:3,10; 골 1:16; 히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행위가 가장 명백하고 독점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구속사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는 이미 완성된 구속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속의 열매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예컨대, 믿는 자들이 드리는 감사와 기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다.(요 14:14; 롬 1:8; 골 3:17; 히 13:1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눅 22:69; 골 3:1; 히 12:2) 하늘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한 일면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롬 8:34; 히 7:25)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종말에 있게 될 부활과 심판의 때에도 계속될 것이다. 즉 부활과 심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고전 15:22, 52~54; 살전 5:16; 마 25:31~46; 요 5:27; 행 17:31)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적 기도”, 라는 표현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 아닌 “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제87회 / 2002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소나 양을 잡아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물의 피를 단에 뿌린 뒤 그것을 불살랐다. 이것이 곧 레위기의 제사요, 이 단이 바로 모세의 제단이며, 죽임을 당한 소나 양들이 희생의 제물이었다. 이 제사는 마침내 모든 제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신약시대에 들어 예배로 내용과 형식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교회는 지금도 예배를 제사의 의미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의 제단에 나와서, 작은 제물을 바칩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으로서 제의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점을 지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신화, 민속, 종교의식 등이 모두 제단 근처에서 성육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구약의 제사용어를 예배 속에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부자연스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국교회 역시 제의적인 문화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제사는 ‘예배’로, 제단은 ‘성단’으로, 제물은 ‘예물’로 바꾸어야 한다.
한편, 제단을 ‘강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이것은 성례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교만 이루어지는 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므로 ‘성단’이라 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영시(0시)는 하루가 끝남과 동시에 또 하루가 시작되는 밤 12시 정각, 곧 자정을 가리키는 시각이다. 교회가 이 시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한 해가 지나가고 다시 시작하는 연말연시의 자정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연말연시의 0시에 드리는 이 예배를 영시예배나 자정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예배는 감리교회의 존 웨슬리가 언약갱신예배(Covenant Renewal Worship)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는데 새로운 해를 맞아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예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날짜의 특성을 강조하여 야성회(Watch Night Worship)라는 이름이 나왔고, 한국교회에서는 단순히 시각만을 앞세워 0시예배라 부르고 있다.
예배가 시작되는 시각을 예배의 명칭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낮11시예배, 밤7시예배가 예배의 이름이 될 수 없듯 0시예배 역시 마찬가지다. 또, 0시는 예배 시작 시각도 아니다. 교회에 따라 밤 11시나 11시30분에 시작하여 고백의 시간을 갖고 새 언약을 세우는 중에 새해를 알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을 가리켜 ‘송구영신’, 또는 ‘송영’이라 한다. 이 의미가 예배의 성격 및 내용과 일치하므로 ‘송구영신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송영’은 ‘송구영신’의 준말이지만, 찬양에서의 ‘송영’과 동음이어서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2. 수양회 ⇒ 신앙수련회
절기가 바뀌면 교회마다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특히 기도원이나 수양관이 있는 교회는 그 장소를 활용하여 행사를 펼치는데 그 내용이 점차 새로워지고 다양해져 말씀집회, 찬양콘서트, 각종 이벤트, 세미나와 워크숍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아무리 수양관에서 행사를 치른다 하더라도, 이런 행사를 전통적 용어인 수양회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그 성격이 크게 바뀌고 말았다. ‘수양’이란 도덕적 품성을 닦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용어를 가지고서는 현대의 다양한 행사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다.
교회의 공동체 훈련이라는 목적을 잘 드러내면서 다양한 행사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신앙수련회’가 적합하다. ‘수련’은 마음과 몸을 잘 닦아서 익힌다는 사전적인 뜻을 갖고 있으며, 특히 정신을 닦고 기르는 데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로도 익숙하다. 여기에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뚜렷한 목표를 앞에 내세우게 되므로 가장 합리적인 명칭이다.(제87회 / 2002년)

13. ...... 기도로 폐회합니다 ⇒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예배가 끝날 즈음해서 예배 인도자가 이제 “○○○ 목사님 축도로 폐회합니다”, “○○○ 장로님 기도로 폐회합니다” 또는 “○○○ 집사님이 폐회기도를 해 주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의 각종 회의에서 그 회의가 끝날 무렵 의장이 “○○○ 장로님의 기도로 폐회합니다”, “폐회기도를 ○○○ 집사님이 해 주시겠습니다”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무의식중에 예배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예배가 회의가 아닌 이상 반드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주일날 드리는 주일 낮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나 수요기도회, 금요밤 심야기도회 등도 비록 우리가 관례를 따라 ○○회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바로 예배의 일종이므로 이 때에도 “○○○의 기도로 폐회합니다”와 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교회 밖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든지 예배가 끝날 때 위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은 안 된다. 예배는 어느 경우나 ‘○○회’가 아님을 분명히 새겨둘 필요가 있다.(제87회 / 2002년)

14.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기도로
예배드릴 때 기도 인도자가 기도의 마무리를 하면서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는 바람직한 표현이 못된다.
의탁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긴다’는 의미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거의 ‘그가 대신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이 예배를 도리어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하나님께 의탁하면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필요할 시는 “이 예배를 주장하시고” 또는 “이 예배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로 쓸 수 있다.(제87회 / 2002년)

15. 태신자 ⇒ 전도 대상자
생소한 용어가 교회 안에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바로 ‘태신자’가 그것이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어느 사람을 지칭하면서 장차 태어나게 될 신자라는 의미로 즉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전도해서 꼭 신자를 만들겠다고 속으로 작정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태신자’라고 하고 있다.
임산부의 태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를 태아라 부르는 것에 연유하여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뜻으로 ‘태신자’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태아가 임산부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일진대 그러면 ‘태신자’는 과연 누구의 뱃속에 들어 있다는 말인가.
만일 ‘태신자’를 용납한다면 장차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그 사람을 ‘태목사’, ‘태장로’ 라 해도 괜찮다는 무리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태신자’라는 용어대신 ‘전도 대상자’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6.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집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안수하여 임직한 이들을 가리키는 직분인데, 서리집사와 구별하기 위하여 안수집사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명칭을 줄여 ‘안집’이라는 생소한 말로 부르거나 기록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는 사회에서 유행을 타고 있는 두문자어(acronym) 사용이 교회에 스며들어온 결과라 하겠다.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되도록 줄여 쓰기 위한 목적으로 무리한 약어를 만들어낸다. 이런 현상이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과 맞아 떨어져, 단체이름 줄여 말하기(예, 나라사랑실천본부 → 나사본), 일상어 재미있게 줄이기(예, 바라보고 싶은 사람과 천하에 재미없는 사람 → 바보와 천재) 등 언어생활에 혼란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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