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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03-11-05 (수) 10:05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5082    
중국의 개혁과 개방사

1.배경
  1)개방전의 중국
  2)중국의 개혁,개방후
  3)중국의 이론 피라미드
2.중국의 개혁, 개방후
  1)등소평사망에 따른 중국
  2)홍콩반환
3.중국의 개혁, 개방 후 문화
4.중국의 현시점
5.중국과 우리나라
6.중국의 미래성
7.에필로그

[중국의 개혁, 개방사]
중국의 15억정도 되는 인구는 대단한 자원임과 동시에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은, 진, 한, 오호십육국, 수, 당, 송, 원, 명, 청,나라시대에 그들이 세계의 중심국가라고 했던만큼 아시아지역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중의 하나가 서양의 물문을 빨리 받아들임의 요인도 속할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로 닫혀있던 중국이 자유화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대 중국의 개방·개혁의 진행과정과 홍콩반환후의 모습 후 변화된 중국의 모습을 알아 보겠다. 또한 이러한 기회를 통해 중국의 개방사를 알게해준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1.배경
  
 1)개방전의 중국
♠1949년~1952년
1949년~1952년까지의 경제회복기를 통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한 후 1953년 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함으로써 소련의 스탈린주의식 개발전략인 '불균형 성장모델'을 모방하여 중공업 우선 발전 전략의 계획경제 체제를 채택하게 된다.

1949년 이전의 중국경제는 8년간의 항일 전쟁과 약 4년간의 국공내전으로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농촌은 극히 피폐되어 있었다. 1951년 평화적으로 태베트를 해방하고 나자 타이완과 진먼.횡후.마주등이 섬과샹깡.아오먼만을 제외한 중국대륙 전체는 통일이 되었다.

1950년 겨울부터 개혁.개방전의 중국은 우선재산 소유제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종전의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 공유제라는 공유재산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중국농촌의 정치,사회.경제.사상에서의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대대적인 반혁명적 세력의 진압을 실행하여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를 공고히 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하였고,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펑떠화이를 사령관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북한지원에 투입되었고, 1953년 7월 정식으로 정전협의가 타결되고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1950년과 52년사이에 중국에서는 정권의 안정분야에서 「공동강령」의 원칙에 따라 민주정치를 통해 지방의 각급 정권을 수립하는 동시에 위로부터 아래로 국가 기본제도로서의 인민대표대회 제도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국가기구의 편제를 정비하여 간소화하는 작업도 이어지게 되었다. 중화민공화국의 건국 후 중국정부는 소수민족 지구에 민족적인 자치구역 정책을 실행하여 민족의 평등.단결.공동발전을 실현한 것이다.

1951년 겨울부터 다음해 봄에 국가기관과 경제부문, 각 기업과 사업의 단위마다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를 추방하는 '3방운동'을 전개하는 정치를 해나가기 시작하였고, 1952년 중국 정부는 국유화과정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불법적인 개인기업가들을 소멸해 버리기 위해 '5반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또한 농업과 기타 중요한 농·공업 생산성과는 모두 역사상 최고기록을 초과하고 있으며, 국내외무역도 모두 신속한 회복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1953년~1957년
1953년 중국은 계획적으로 대규모의 근대화를 향한 발전에 착수했는데, 그 발전 방침은 중국공산당이 제출한 '과도시기의 총노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마오쩌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하기까지는 하나의 과도시기이다. 이 과도시기에서의 당의 총노선과 총임무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할 것이며, 기본적으로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적 상업의 사회주의에로의 개조를 실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53년~57년)이 소련의 도움으로 실시되었다. 이 계획은 농·공업의 연평군 성장률은 11.9%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 공업은 연 18%, 농업은 4.5%, 경공업은 연 12.9%, 중공업은 25.4%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1차5개년 계획 동안 중국지도자들은 노동력 활용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집약적 공업투자에 치중하여 실업문제가 야기되었고, 농업부문의 성장률을 저하시켰으며 국제수지 불균형의 문제를 악화시켰다.  

1954년은 제1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켜서, 중국이 법치국가로 나가는 중요한 지표가 제시되었다.

1955년 런따 제2계 제2차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병역법」과 법규.조례를 통과시켜, 인민군의 의무병역제, 계급제, 봉급제를 실행하여 인민군 정규화의 중요한 조치와 지표를 마련했다.  여름이후로는 개체농업과 수공업과 자본주의적 상공업을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급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56년에는 농촌지역에서는 토지개혁, 농업합작화, 농촌인민공사등의 방식을 통하여 소유제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도시에서는 국민당정부가 운영하던 공영기업은 몰수, 사영공상기업은 '공사합영'으로, 개인수공업은 '합작화'방식으로 소유제를 개조하여 사유재산제도를 기본적으로 폐지하였고 해마다 공유제의 비중을 높여 갔다.

1957년 2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전국에 5백만 이상의 지식인들이 있는데, 그가운데 10%이상은 우파라고 추산하여, 재능있는 지식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을 제거하였다.

♠1958년~1960년
1958년에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이 목표였고 모택동은 농.공업 분야의 침체일소와 비약적인 발전을 목표로 한 2차5개년 계획(1958~62년)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노동력이 조직화되어 농촌지역에서는 '농촌인민공사'가 조직되었고 농촌의 집체화를 통한 '정사합일'체제가 확립되었다.

농민의 재산은 모두 인민공사에 헌납하여 공동소유로 하였고 생활은 남녀 공동 합숙소에서 생활하였는데 1959년부터 3년간의 홍수, 가뭄, 해충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업생산량이 격감하는 등 실패를 맞게 되었다.

1960년7월 소련정부는 갑자기 일방적으로 몇 백개에 달하는 계약을 철회하고, 자연재해로 인하여 60년에서 51년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참고]집체소유제 : 사회주의적 전민소유제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적 성격을 가지는형태.

♠1961년~1965년
대약진운동은 많은 문제점들을 남기고 실패함에 따라 중국 당국은 대약진 정책을 수정하였는데, 모택동이 후퇴하고, 등소평이 전면에 나서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62년말이 되자 상황이 많이 호전되면서 농업생산력과 생산 수준도 더이상 하락하지 않았다.

1963년에서 65년까지 다시 지속적인 조정이 있어서 공업총생산은 국민소득과 국가재정수입, 주요농업, 공업 생산량에 있어서 1957년을 초과하였다. 이에따라 경제적 장려제도가 부활되고 정권수립 후 처음으로 농업부문의 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자유시장제가 도입되고 전문관료와 기술자의 경영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는 등 정책은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중국경제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이 권력회복을 위하여 유소기와 등소평을 주자파로 몰아 처절한 권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경제상황을 마비시키게 된다.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시기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의 실세 권력자인 유소기. 등소평등 소위 실무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으킨 문화적 정풍운동으로 시작 되어 모택동과 그 추종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1975년 당시 총리인 주은래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 기술의 '4개현대화'를 제시하였고, 주은래 및 모택동의 사망후 화국봉이 이를 승계 추진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등소평 집권 후 중국을 개혁.개방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76년 9월9일 사망한 모택동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은 명백히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다. 화궈펑은 요즘의 강택민처럼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  중앙군사 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 등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모조리 독점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강택민이 최고 실력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회의의 막후 실력자는 따로 있었다. 11기 3중전회는 덩 샤오핑의 뜻대로 진행됐고, 덩샤오핑의 뜻에 따라 개혁개방 정책이 결정됐다.

화궈펑의 집권시 중국공산당은 66년부터 76년까지 10년동안 계속 된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의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홍위병들 이 중국 대륙 전역을 누비며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문화대혁명은 76 년 1월8일저우언라이(주은래)총리가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종말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4월5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베이징 중심부의 천안문광장에 홍위병 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의 손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시민들은 잠시후 자신들이 가 져다놓은 꽃다발을 치워버리려는 공안경찰 인민해방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에는 1만여명의 공안경찰과 인민해방군이 출동, 곤봉으로 광장에 모여있던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해 해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1차 천안문사태였다.

9월9일에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7월6일에는 주 더가 세상을 떠났다. 중국공산당 1세대를 이끌던 세 개의 '큰 별'이 잇달아 떨어진 것이었다.

10월6일 중국공산당은 화궈펑에게 당중앙 주석과 당중앙 군사위원 회 주석을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이 무력을 쥐고 있는 예지엔잉 당시 국방부장과 잘 '협의' 한 결과였다. 10월14일 중국공산당은 4인방이 '분쇄'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화궈펑은 당·정·군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국면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인방을 분쇄해놓고도 문화대혁명은 찬양하는,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요즘도 중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베스트셀러 '교봉'은 "4인방이 없는 문화혁명이 계속되던 시기" 라고 표현, 중국 지도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그런 분위기에서 77년 7월에 열린 제10기 3중전회는 등소평을 당 부주석과 중앙군사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군을 쥐고있는 예지엔잉이 "덩샤오핑 동지 같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손해"라면서 복권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1977년~1978년
1978년 10개년 경제개발계획을 확정하고 급속한 발전을 추구하는 급진정책을 계획하였다. 농업의 기계화 및 120개의 대형 프로젝트건설 추진 등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의욕적인 계획으로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서방이나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겠다는 방침이었으며 '양약진'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비현실성으로 경제를 더욱더 어렵게 하였으며, 농업생산량은 저조하였고, 경공업투자부족으로 생필품은 품귀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경제를 중시하는 실용주의노선 표방과 양약진 추진 동안 실무파들의 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978년 12월 당 11기3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 현대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기본방침이 채택되어 등소평 노선이 확정되고 1979년 4월 중앙공작회의에서 '조정.개혁.정돈.향상'의 신팔자 방침을 채택함에 따라 중국은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을 포기하고 혁명보다는 경제 건설에 치중하는 실용주의 노선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중국 경제개발전략의 변화와 특징>

기   간

부분간 우선순위

기술선택

지원수단

유인체계

1차5개년 계획기(1953~57)

중공업, 경공업, 농업

자본집약적

대규모 소련원조

물질적유인

대약진기(1958~65)

중공업, 경공업, 농업

노동집약적

소련원조 중단     자력 갱생

비물질적 유인

경제조정기(1961~65)

농업, 경공업, 중공업

자본,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물질적요인

문화대혁명기(1966~76)

중공업, 농업, 경공업

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비물질적요인


2)중국의 개혁,개방후
♠농업개혁시기(1979년∼83년)
경제개혁을 농촌에서부터 시작한 이유는 첫째가, 중국최대 다수의 인구인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였고 농민과 농업문제가 중국혁명과 건설의 근본 문제이다.

둘째로, 농촌인민공사 체제는 실행과정에서 생산효율의 저하로 농업생산의 정체를 가져와 중국 경제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었다.

'농업생산 책임제'는 생산대 소유의 토지를 여러종류의 청부생산제하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토지는 여전히 공유제이나 농민이 자주적으로 생산 및 경영하도록 하는 거이다. 1980년 중국정부는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농업생산 책임제를 실시토록 하여 2~3년 후에는 약 90%이상의 생산대대에서 농가생산 책임제가 시행되었다. 또한 이중 경영체제를 수립하여 집체경영과 개인경영을 다같이 중시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농촌경제개혁은 198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도시상공업개혁시기(1984년∼88년)
도시를 중심으로 한 개혁으로서 1984년 10월 당 12기 3중전회에서 경제개혁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채택하였다.

첫째로, 기업의 활성화를 중심 고리로 하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는 자주권을 확대시키며, 기업경영과 관리방식을 개혁하여 공장장에게 생산.일반관리 권한을 주고 기업활동의 전반에 걸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공장장책임제가 실시되었다.

둘째로, 시장메커니즘의 제한적도입으로 상품가격과 노무가격의 왜곡과 가격체제를 조정 개혁하였고, 셋째로는 기존의 경제체제하에서 국가가 기업의 관리라는 미시적 경제활동에 따라 거시적 경제 관리 업무에 소홀히 하였던 바, 거시경제 조정체계를 수립.건전화시키는 일이다.

넷째는 공유제를 주체로 한다는 전제하에 다양한 소유제경제를 발전시키고, 마지막으로는 국가.집단.개인간 그리고 중앙과 지방간의 합리적인 국민수입분배국면을 형성한다.

♠치리정돈시기(1988년∼91년)
1988년 봄 가격개혁의 실시단계에서 소매몰가의 폭등으로 인플레이션심리가 만연되어 상품 사재기, 예금인출등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하반기에는 물가가 상승하여 '경제환경에 대한 처리, 경제질서에 대한 정돈'이라는 조정정책을 실시하였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한 보수파는 정권 및 테제 불안의 비상시국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치리정돈'정책을 이용하여 비교적 안정되었다. 또한 1991년에는 북경 아시아게임의 성공적 개최로 유리하게 작용되었고, 1991년 8월3년간의 긴축정책을 종결하였다.

♠개혁심화·개방확대시기(1992년∼1997년)
1992년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확대와 심화를 독려하는 내용의 소위 '남순강화'를 발표하였고, 이를 위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이 담화는 1992년 2월 당 중앙 2호 문건으로, 1992년 3월 당정치국 전체회의에서 당 중앙 4호 문건으로 구체화 되어졌다. '남순강화'의 '개혁.개방 가속화'요구 내용은 당 14기 전국대표 대회에서 그대로 수용되어 경제운용 기본노선의 근간이 되었으며, 현재 중국이 추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경제체제 개혁에 있어서 국유기업의 경영체제를 시장 대응형으로 전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였으며, 대외개방에 있어서는 '4년개방'으로 불려지는 전 방위 지역 개방과 무역, 금융, 백화점 등 3차 산업을 개방하고, 무역체제 개혁을 통한 시장개방작업을 추진하였다.

강주석과 주부총리는 '상해방'은 연고지인 상해를 향후 95계획의 중점발전지역으로 밀어붙여 광동성등 다른 연해지역과 내륙지방의 반발을 샀으며, 특정지역에 대한 편파적인 특혜라는 분위기가 지도부내는 물론 다른 지방에 팽배해 있었다. 등시대에는 지방에 대폭 경제권한을 위임하는 방임자세를 취했지만 3세대 지도자들은 중앙의 권위강화가 바로 체제의 안정과 지결된다는 판단에서 위임권한의 회수에 전력하였다. 즉, 95계획안은 각 파벌과 지방세력이 자기의 이익을 위한 힘겨루기 이며 장기발전전략보다는 지역적인 파당권익만이 반영되는 비효율적인 타협안이었다.  


♠개혁·개방  연표
  ▲77년 7월=덩샤오핑 복권
  ▲78년 12월=11기 3중전회에서 4개 현대화노선 채택
  ▲79년  1월=미국과  수교
  ▲79년  2월=리셴녠,계획경제를 위주로 시장경제를 보조수단으로 하는「주보론」수립
  ▲79년 6월=제5기 전인대 2차회의,「조정·개혁·정돈·제고」현대화8자 방침 결정
  ▲80년 8월=선전 주하이 산터우 경제특구 지정
  ▲84년 10월=제12기3중전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영 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실각.장쩌민 총서기 취임
  ▲91년  3월=국민경제·사회발전 10개년계획(1991~2000)발표
  ▲92년  2월=덩샤오핑,남순강화로 개혁·개방 촉진
  ▲92년 10월=당 14전대회,「사회주의  시장경제」표현 결정
  ▲93년  3월=헌법개정안 채택
  ▲93년  6월=주룽지 국무원 부총리,인플레억제책 시행
  ▲94년  7월=회사법,대외무역법 제정.주룽지  제1부총리 경제대권 장악
  ▲97년  9월=세계은행, 2020년 중국 GDP규모 미국,일본이어 세계3위 전망
  ▲98년  3월=주룽지 총리 취임
  
3)중국의 이론 피라미드
'사회주이 초급단계론'이 전체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고 사회주의이기는 하나 아직 생산력이 낮은 초급단계에 처해 있는 중국에서 채택해야 할 목표노선으로서 이 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제출되었다. 그 내용은 경제건설이 모든 활동이 중심목표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 노선이 네가지 기본 원칙과 개혁.개방의 견지라는 것이다. 지금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목표하는 바는 경제발전 수준을 낮은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점에 있어서는 경제건설이 지상명제이고, 그 방법론은 네가지 기본원칙으로 공산당 독재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개혁.개방으로 경제발전을 꾀한다고 한다.

2.중국의 개혁, 개방후
  
1)등소평사망에 따른 중국
등소평<1904∼1997>의 죽음은 중국경제에 대혼란 사태는 오지 않았다.  중국경제는 등소평이 없어도 자생력이 있으며, 정권승계되 이미 다 이루어진 상태여서 강택민체제가 갓 출범한 정권이 아니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었다. 오히려,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고, 등소평에 이어 개방정책기조를 그대로 이어받는게 확실했다.

새 정권은 과거의 계획경제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되돌아가면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혁 그 차체가 빚은 급격한 사회변화도 다른 불안 요인으로 지적된다. 국영기업 효율화 등의 여파로 실업자 1억명 이사이 발생, 대거 도시로 몰려들고 있어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등소평이 평소 시장 경제의 '필요악'이라고 지적해온 빈부차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관료의 부패와 권한 남용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강택민 주석을 비롯한 3세대 후계지도자들은 고도성장 위주의 등소평 노선으로 인한 부작용을 시정하는 차원으로 인플레억제, 지역간 경제격차 해소,농업중시,국유기업 활성화등의  정책을 적극실시,등이후 시대의 체제안정을 확보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등소평
등소평은 중국을 부국을 향한 시장경제 사회로 개방한 인물로서 위대하다. 1980년 이후 등소평이 제시한 중국의 3단계발전전략은 주효했다.

첫단계로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GNP를 2배로 성장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고, 두 번째 단계로 1991년부터 2000년가지는 GNP를 두배로 늘려 개발 도상국가의 중간 정도로 끌어올리며, 마지막 단계로 21세기의 중엽까지는 중국을 현대화한다는 것이 등소평이 미국 기자들에게 한말이었다. 키도작고 서방경제에 그리 해박해보이지도 않는 부도옹등소평이 이런 구상을 발표하면서 중국의 GNP를 4배로 성장하여 1인당 GNP 1,000달러인 제2단계를 2000년에 마무리짓겠다고 할 때에 믿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등소평의 구상을 5년이나 앞당겨 1995년에 달성하여 세계7위의 경제 대국이 된 위대한 날, 위대한 국민이라 할 수 있다.

등소평이 개혁이전이 중국은 전형적인 계획경제국가였다. 상품소매가격의 97%를 국가가 결정했고, 공업용 원자재 출고가격의 100%를 국가가 결정했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 정책 추진이후 1994년 중국 상품 소비가격의 국가 결정론은 7.2%로 줄어들었고,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이 2.4%로, 중국이 시장경제에 가격을 자유화시킨 비율은 물 90.4%가 되었다. 공업용원자재도 국가가 가격을 결정하는 부분은 14.7%,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은 5.3%로 시장에서 자유롭게 가격이 결정되는 부분이 80%로 늘어났다. 이쯤되면 완전 개방이라고 해도 좋다.

등소평의 개방과 개혁 정책이 수행되면서 1995년가지 중국에는 10만개에 이르는 각종시장이 생겨났다. 이 중 농산물 도매 시장이 2100여개, 공업용 도매 시장이 600여개, 생산품 원자재 시장이 800여개, 그리고 소규모 상업 체인망은 무려 1천 400만개나 늘어났다. 이리하여 1995년 현재 중국은 시장 상품 가격 지배율이 90%가 넘는 국가가 되었다.  대외개방은 4개의 연해 지역에서 경제 특구와 해남 대특구라는 이름으로 시험적으로 시작되었다. 4년 후에는 대외개방 경제 특구가 열 네 곳으로 늘어났다. 1985년에는 양자강과 주강, 그리고 민남의 세 삼각주로 개방했다. 이어서 1988년에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그리고 환발해 지역을 개방하여 연해 지역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였다. 뒤이어 중국은 장강 내륙14개 도시를 개방하여 연해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국경 지역에 이르는 전 중국 개방을 단행했다.
  
  2)홍콩반환

♠영국의 홍콩강점
홍콩은 원래 광동성, 신안현에 속하며 주강구 연해의 작은 어촌이다.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은지 10여년후 청조가 태평천국(1853-1864)의 난에 의해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아편무역을 합법화하기 위해 1856년 10월 광주의 황포에서 청조 관헌이 영국 국기를 걸고 있던 중국인 소유 상선 "애로우호"에 타고 있는 해적을 체포하자 영국의 광주주재 영사는 이 배는 영국선이라고 우기며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와 공동 출병, 1957년말 광주를 침략하여 소위 '제2차 아편전쟁'을 발동했다. 1858년 5월 영불 연합군이 천진 입구의 대고의 포대를 함락하자, 청조 함풍제(재위 1851-1861)는 영국·프랑스와 각각 <천진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후에 이를 내심 반대한 청조의 공격에 후퇴당했던 영불은 다시 1860년 7월 2만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9월 천진을 점령, 명·청간의 번영을 상징했던 북경 근교의 황궁 원명원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10월 북경을 함락, 청조를 굴복시켜 각각 <북경조약>을 체결했는데, 영불은 이 <북경조약>에서 <천진조약> 일체를 다시 인정받아 천진을 추가로 개항시키고, 또 영국은 홍콩섬 맞은편 '구룡사지방'(현재 구룡반도 남부의 계한가 이남의 영토)을 할양받고, 영불 연합군은 군사비 배상으로 각각 800만냥을 받기로 결정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 강화를 중간에서 조정한 대가로 1858년의 <아이흔조약>에 이어 1860년 11월 <북경조약>에 의거 동북지역인 흑룡강 이북의 영토와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 및 쿠릴열도(사할린)를 포함한 100만㎞²의 광대한 영토를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획득했고, 이후 19C말까지 서북지역의 51만 Km2를 또 획득해 갔다. 그외에도 중국은 상해로부터 서쪽으로 양자강 상류까지의 주변 일대는 영국의 세력하에, 대만과 복건성 및 만주와 한반도는 일본 지배하에, 산동 일대는 독일의 세력하에, 만주 위쪽과 외몽고·내몽고 일대의 긴 북쪽지역은 러시아의 세력하에, 그리고 남쪽 광동·광서·해남도·곤명 일대는 프랑스의 세력하에 각각 배타적으로 편입되었다.

게다가 1895년 청이 중일전쟁 패전이후 열강이 다투어 중국에게 '조차'를 요구할 때, 영국은 1898년 6월 9일 다시 홍콩 부근을 광동일대의 프랑스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북경에서 중·영<전척향항계지전조>란 것을 체결하여 지금 심천 이남의 신안현의 심천하 이남과 구룡반도 계한가의 이북지구의 넓은 지역과 이 부근에 속한 235개 도서를 99년간 조차해 갔다. 후에 이 중국대륙과 연결된 지역을 '신계' 즉,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칭해지게 되었는데, '신계'의 빌리는 기간은 1997년 6월까지로 했다. 위의 모든 할양받은 지역과 빌린 지역을 합쳐 간단히 '홍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신계' 지역은 홍콩 전체 면적의 92%를 점할 정도로 크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댓가로 어떤 보상도 받은 바 없다. 이처럼 힘없는 중국은 완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지게 되고 열강은 엄청난 이익을 중국을 포함해 전세계로부터 탈취해 간 것이다.

♠홍콩중국에 반환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됨에 따라 중국대륙은 50년동안 1국가 2체제(일국양제)유지를 약속을 했지만, 적지않은 홍콩인들과 외국자본이 해외로 빠져 나갔으며,  중국정부가 상하이등 연안도시들을 무역항으로 집중육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이 '자유항'으로써의 이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하였지만, 반환이 된 후 증시는 좋았고, 부동산 경기 또한 좋았다. 즉, 경제력만 놓고 보면 홍콩은 중국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중국의 자본이 홍콩으로 진출하였고, 중국과 화안이 합작으로 설립한 은행도 생겨났으며, 홍콩의 부족한 인력난을 인건비도 싼 중국 출신 인력이 매워졌으며, 문화적 동질성까지 공유하여 홍콩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3.중국의 개혁, 개방 후 문화
현대 중국인의 색생활은 아침 일직 북경의 거리를 나가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거리 곳곳에 있는 유조 또는 유배라 불리는 밀가루 음식과 조로 쑨 죽 또는 두장을 사서 먹거나 집으로 가지고 가서 먹는다. 점심 또한 마찬가지이고, 저녁은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서 먹지만 현대 생활에 그럴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북경을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에는 외식 산업이 성업중이다.
중국의 노점상들은 현대화를 정돈된 도시로 파악하는 정부정책에 밀려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이 그렇듯 국가도 세금 걷기에 불리한 노점상을 고깝게 볼 리가 없다. 더욱이 공산화 50주년을 맞아 가로사업을 대대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노점상들의 어려움은 적지 않다. 또한 개방과 함께 할인마트인 '까르프'의 중국식 표기인 지아러프는 '가정에 기쁜 복'이라는 특유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한국에서 '이마트'나 '킴스클럽'으로 알려진 대형할인마트는 중국 대도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아러프의 성공이후 '홈클럽'이라는 할인마트가 생기는 등 종류도 다양해 졌다. 이곳도 한국의 할인마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전제품에서 식료품까지 모든 것을 구비해 놓고 있다.  

백화점, 이제는 시들어가지만 그래도 천진은 중국에 여행온 여행객들이 쇼핑을 위해 들리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건이 싸고, 종류가 많은 곳이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대형백화점과 거리시장이 있는 '빈장다오'(濱江道)다. 이곳은 중국을 대표하는 쇼핑공간중에 하나다. 특히 빈장다오의 거리를 타고 길게 뻗어있는 노점상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리상점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중국공산화 50주년을 맞아 완전히 현대식 상가로 변모했다. 우선 좌판 자체가 금지되면서 상점들이 완전히 상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의 위용은 잃지 않아, 지금도 거대한 상가가 밀집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남대문을 생각나게 한다.

중국에서도 백화점은 이미 쇄락해가는 조루현상을 보이고 있다. 할인마트 등 가격이나 질에서 급격하게 도전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화점은 모든 제품이 안정적인 품질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할인마트와는 변별력을 갖고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서 이혼율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들어 급증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장된 여권과 여성의 고등교육화로 인한 결혼 필요성 감소, 경제적 독립이 늘어가면서 더욱 심해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4.중국의 현시점
1999오늘의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설계하고 장쩌민이 시공하는 새로운 역사적 실험이 진행중이다.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실험은 자주 대신 개방을,투쟁대신  개혁을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자본주의는 경쟁이나 투쟁이 아닌 협력과 모방의  대상이며 부의 축적은 전체보다 개인이나 소집단에 의해 선도될 수 있다는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1997년 말 기준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60달러에 달해, 사상처음으로 '저 소득 국가(785달러 이하)'에서 벗어나 '중등소득 국가(786∼3125달러)'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국민총생산(GNP)도 1조달러를 돌파, 국가별 순위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7위 에 올랐다.
지난 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채택이래 중국의 발전은 실로 눈부시다. 79년부터 97년까지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9.8%에 달한다.

지난 78년 대외무역액은 206억달러로 세계 27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난해는 3251억달러를 기록, 10위로 껑충 뛰어올랐다.78년 1억 7000만달러에도 못미쳤던 외환보유고는 97년말 1399억달러로 불어나, 일본에 이어 세계 2위가 됐다. 여기에 홍콩의 외환보유고(928억달러)를 합치면 중국은 외화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된다. 세계의 투자가 중국으로 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문화혁명의 대혼란에서 벗어나 경제 건설을 국가 제1목표로 설정 한 뒤, 12억 중국인들은 20년만에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경제 기적' 을 이룩했다. 이들의 고도 성장세는 이미 한국을 추월한지 오래이고, 세계경제강국의 대열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97년 여름부터 아시아를 휩쓴 경제위기에도 끄덕하지 않고, 올해 8%에 육박하는 성장을 이룩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무서운 '성장의 관성'은 향 후 수년 동안 쉽게 무너질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다 주룽지(주용기)정부는 올 초 국유기업과 정부개혁, 금융개혁 등 3대 개혁과제를 설정하고, 3년내에 이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에 따라 올 한해 국유기업과 정부부문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쏟아져나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주룽지 정부는 개혁 드라이브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은 일부 품목에서 세계 제1, 2위의 '공장'이 돼 있다. 컬러TV의 경우 중국은 세계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차이홍 캉자 등의 전자업체는 세계적인 TV수출업체로 발돋움하고 있다. 냉장고 에어컨 VCR VCD 컴퓨터 등 중급기술 제품들도 생산능력 과 기술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시멘트도 중국이 최대 생산국이며, 화학비료는 세계 2위이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연간 소득 1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이 3000만명에 달하고, 3000달러 이상의 중산층이 1억에 달하는 엄청난 내수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거대시장은 외국인 투자를 부르는 가장 큰 흡인력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대중국 투자의 감소세를 말하기 도 하지만, 이 시장을 외면할 기업은 별로 없다. 이에따라 21세기에 도 중국의 '세계 공장'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북대태평양과기발전센터는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1,2,3층 수천평 매장은 IBM, 컴팩, 삼성,LG등 외국유명 업체와 리엔샹 베이다팡정등 국내 업체들로 가득차 있으며, 2002년까지 이 건물 옆에 20층짜리 ‘연구개발빌딩’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전시-계약-판패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미래 정보산업의 메카가 될것이다.

군사면에서 중국은 21세기에도 지속적인 군사력 강화를 추진할 것이지만,'경제 우선'의 원칙에 따라 '다극화'와 '평화공존'의 외교 노선을 견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은 그동안 '경제를 먼저 발전시키면,군사 현대화도 가능하다'는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내부적으로 군사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왔다. 중국은 이 군사력을 '전쟁 억 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경제를 '중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당분간 국가 에너지를 몰두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경제발전 혜택이 중국 전지역에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21세기 첨단산업과 우마차를 이용하는 운송수단스카이 라인이 화려한 도시와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농촌이 공존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부유 도시에는 호화 빌딩과 호텔들이 즐비하고 승용차가 자전거전용도로를 점령할 정도로 급증한 반면 이에 비례해 매연과 범죄,매춘,노동착취,마약문제도 폭증했다.

중국인들은 모든 사람이 가난한 것은 참아도, 불평등한 것은 참지 못하는 심리가 있다. 지역간의 지속적인 경제불균형은 사회불안요소로 이어질 수 밖에없다. 따라서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부연해지역과 서부내륙지역의 경제 격차를 해소하는것이 시급하다.

5.중국과 우리나라
지난해 홍콩에 대해서는 10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에 대해서는 28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 2000년에는 홍콩과의 교역규모는 250억 달러, 중국과의 교역규모는 450억 달러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이중 홍콩으로부터는 23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으로부터는 30억 달러의 흑자를 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교역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00년에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 의존도가 26.3%, 2005년에는 33.4%, 2010년에는 39.9%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중국과 홍콩을 합칠 경우 우리 수출의 17.4%를 차지해 미국을 제치고 최대시장으로 부상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한국의 대 중국 의존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향후 중국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통찰하고 대 중국정책을 펴나가야 한다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의 생산력과 홍콩의 자본·기술·관리·마켓팅 능력등이 합쳐지면 곧바로 한국 제품과의 경쟁범위가 확산될 것이 예상되고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며 우리의 최대 경쟁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매년 유치되는 외자가 400억 달러에 이르러 한국의 외자유치가 시작된 1962년부터 1995년까지 투입된 외국자본 총액인 180억 달러와 비교할 때, 중국 1년간 외국인의 투자액이 30여년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액 보다도 2배 이상 많다는 놀라운 점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홍콩 사이의 관계는 날로 긴장될 것으로 전망되므로 한국은 제품의 가격·품질·기술면에서의 경쟁력 제고와 합리적인 기업운영, 국제경쟁력 및 협상능력 제고, 정부의 올바른 경제정책, 정치적 신의와 역량증대 등으로 중국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반드시 중국과 선린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강화해 남북한의 힘을 집중·단결하고 경쟁력을 제고해서 우리의 대 중국 경쟁능력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6.중국의 미래성
중국은 지난 96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21세 기 '중국경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9·5계획과 2010년 장기목표 요강(이하 요강)'을 채택했다. 이 '요강'은 제9차 5개년 계획기간 (1996년∼2000년) 동안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8%로 유지하고, 오는 200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지난 80년의 4배 수준(약 1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2010년까지는 국민총생산(GNP)을 2000년의 2배로 배증시킨다 는 계획이다. 이에 앞서 지난 87년 중국은 '3단계 발전 전략'을 통 해 21세기 중반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중진국 수준(약 4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결국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을 2000년까지는 1000달러로, 2010년까지는 2000달러로 끌어올려 '소강(약간 여유가 있음)'을 실현한다 는 계획이다. 한국과 대만 등이 이미 여러해 전에 달성한 경제 목표를 중국은 21세기중반까지의 과제로 설정한 셈이다. 하지만 '요강'에는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중국인들의 경제적 욕구만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요강'은 중국의 '전통적인 계획경제 체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과 경제성장 방식을 '조방형'에서 '집약형'으로 전환한다는 2개의 체제전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전자는 '생산관계'의 개혁을, 후자는 '생산력의 발전'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울러 '요강'은 농업에서부터 교통운수 통신 에너지 기계 전자 석유 자동차 건축 등 각 산업 분야와 과학기술 교육 국유기업 개혁 등 장기 개혁 과제를 설정하고 있다. 경제구조의 근본을 바꾸고, 사 회 모든 부문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다

중국은 최근까지 연평균 12%의 경제성장률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2010년까지 8~9%, 2020년까지 8%의 성장을 지속한다면 2020년의 중국은 국민총생산이 미국을 능가하여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과 앞으로 20년이면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전국토를 벤처기업과 첨단지식경제의 동부, 자원공급지역인 서부, 서부개발을 지원하고 동부의 산업을 이어주는 중부를 각각 특색있게 개발한다는 전략하에 전국토 3분대게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목표는 건국100주년인 2050년까지 8,000-1만달러 수준까지 끌어 올려 부강하고 문명하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중국경제가 세계경제호조, WTO가입,확대재정정책 효과 등에 힘입어  올해를 기점으로 상승기조로 전환될 것이라는 중장기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미래는 그러나 온통 장밋빛만은 아니다. 향후 수 년간 중국지도자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실업과 정치 민주화 문제가 될 것이다. 2000만명을 넘는 실업자들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시위에 나서는 등, 이미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불안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불만은 대학생 지식인 기업인 등의 정치 민주화 요구 와 결합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주도의 정치체제를 고 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길게 보면 중국은 한 세기 전 서구 열 강의 '반식민지' 상태로부터, 21세기를 앞두고 세계사의 전면에 다 시 등장하는, '100년만의 대반전'을 이룩했다. '중국의 세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7.에필로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다. 정말 중국은 10년 동안에 1인당 국민 소득을 2배로 올린 세계의 유일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통계에서 보면, 일본은 35년이 걸렸고, 미국은 50년, 한국은 17년이나 걸린 것을 중국은 단 10년에 달성한 나라이다.

그들의 15억인구의 힘은 이렇듯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좀더 잘 살기 위해 개방을 택한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힘을 발휘하였다.

요즘 내가 느끼는 중국은 모든 물건에 MADE IN CHINA로 새겨 놓았다. 즉 그들은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모든 물품의 공급의 기지가 되어버린 듯 하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욱 더 심화 될 추세일 것이다. 21세기의 중국은 중국인 자신들만 자기 나라에서 먹고 입고 사는 시대가 아니라, 중국인이 만든 모든 제품이 전 세계인에게 공급되는 시대일 것이다. 거기다가 세계제일의 자유무역을 자랑하는 홍콩까지 포함하니 그거대한 땅과 거대한 노동력이 나는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중국인에게 바라고 싶은 점이 있다면, 잠시나마 회사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 중국과 거래를 하였는데, 행동이 타국에 비해 좀 느리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좀더 민첩해 지는 것과 더불어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사이에 있는 북한과의 관계가 평화와 번영을 함께 달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최대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끝으로, 중국에관한책과, 홈페이지등의 자료등이 무수히 많은 것을 보고 놀랐고, 사회주의로만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사는 중국의 새로운 면을 보는사고전환의 기회를 주었다.

☞참고도서
「중국학 개론」송봉규,정재일외 지음. -동양문고-
「코카콜라 병에 빠진 중국」탄도요사노라지음. 김양수옮김. -자작나무-
「한국 중국 일본, 지금은 몇시인가」차동진 지음. -한울출판사-
「중국의 개혁.개방사」짱주어지음. 오재환옮김. -새론서원-
 [세계일보]1995년5월18일  15면(경제)
 [조선일보]1997년2월21일   4면(해설)  
 [세계일보]1995년9월24일   6면(외신)
 [중앙일보]1997년7월2일   28면(외신)
 [경향신문]1998년12월17   07면(외신)
 [한국일보]2000년3월2일   10면(외신)
 http://www.kinds.or.kr(신문자료 참고 사이트)
 http://myhome.shinbiro.com
 http://www.hitel.net
 http://www.chosun.com

출처/차이나인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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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11-05 (수)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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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별 중국인의 성격특징
지방별 중국인의 성격특징



중국은 국토가 워낙 넓어 지역마다 중국인의 특징이 다르다. 중국의 남방과 북방이 틀리고 내륙과 해안지역이 틀리다. 북방 사람은 보통 무예에 능하고, 성격이 거칠고,소탈하며 의협심이 강하다. 그러나 남방 사람은 영리하고 섬세하며 부드럽고 재치가 있다.

황하 이북의 북방 지역은 중화 민족의 발원지로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한다. 전통적 사상이 강해서 문화적 우월감이 있다. 그러나 토지와 기후는 상당히 불리하다. 이곳의 토지는 상대적으로 척박하고 수자원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의 생활형편은 대적으로 어렵고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 수준도 남방에 비하여 뒤떨어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지나치게 침착한 반면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방은 개발의 시점이 북방보다 늦었지만, 지리와 기후조건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생산물이 매우 풍부하고 수상 운수도 편리하여 상업발전 정도가 비교적 높으며 문화수준도 앞서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남방 사람은 비교적 열정적이고,개척정신이 강하며, 삶에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연해지방은 비교적 일찍 근대문명과 접하였기 때문에 해외 무역도 일찍 시작되었다. 그래서 연해 지방의 중국인은 내륙의 중국인에 비하여 안목이 넓고 마음 씀씀이가 크며 상업적 재능과 모험정신도 특출하다.

본질적으로 북부 중국인들은 정복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고, 남부 중국인들은 장사꾼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는 역대 왕조를 세운 사람들이 대부분 북부 중국인들이고, 남부 중국의 양자강 출신 가운데는 왕조를 세운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 화북지방 사람의 특성

1. 북경
집치장과 옷차림보다도 먹는 것을 첫째로 한다. 중국의 수도인 고로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고 예절 바르며, 정치에 대한 관심이 크다.

2. 천진
정치에 관심이 적고 가정에 대한 관념이 특별히 강하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비교적 수다스럽고 말소리의 억양이 높고 강하다. 우리나라에 ‘인천 짠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천진 사람들도 인색한 편이다.

3. 하북
성격이 쾌활하고 명랑하며 중국전역에서 가장 유머가 풍부한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다.

4. 산서
탁월한 상업적 재능과 대기업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재능이 많고 약은면이 있으나, 순박하고 소탈하다.

5. 내몽고
호방한 성격이 짙으며,몽고족은 특히 손님을 잘 반긴다. 한족도 몽고족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직선적이고 술을 잘 마시며,한번 결정한 일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실행한다.


□ 동북지방 사람의 특성

1. 요녕
만주족과 한족을 구분 하기는 어렵지만,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만주족의 일반적인 특징은 퉁구스(Tungus)형과 유사하다. 여자들은 농사일에 부지런하며 개방적이다. 또 재주가 많고 일을 잘한다.

2. 흑룡강
성격이 호방하고 거칠지만 순박한 면이 있다. 그들은 손님을 매우 반가이 맞는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일을 열심히 하지만 술을 많이 마시며 싸움도 잦다.

3. 길림
흑룡강 사람과 유사하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호방하며 순박하다.


□ 화동지방 사람의 특성

1. 상해
지역감정이 강하고 옷맵시에 신경을 많이 쓴다. 인색하고 속이좁은 것도 특징이다. 장사를 아주 잘하며 두뇌회전이 아주 빠르다.상해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아주 강하며 문화,교육 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2. 산동
산동 사람은 남방 사람에 비하면 피부가 약간 검고 눈이 크며 체형이 왜소한데, 상업보다는 농경업,공업,운송업에 더 관심이 많다. 비록 기민성은 부족하지만,그들보다 훌륭한 철도 노동자와 광산 노동자는 찾아볼 수 없다. 상업에 능하지 못하지만 물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재치있고 선량하며 직선적이다.

3. 강소
농경업,소공업,어업은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기본업이다. 상류계층에서 정교한 문화가 배양되고 있는데,예를들면 소주의 자수와 같은 문화이다. 사람들이 똑똑하고 사리가 밝으며 성격이 온화하다.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4. 절강
일반적으로 성격이 온순하여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연해 지역에는 특수한 종족으로서 영파(寧波)인이 있다. 영파인은 근면하고 진취적이며 대기업가의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상업에 종사하는 영파인의 재간은 유태인에 비길 수 있다.

5. 강서
강서 사람은 인접한 호남(湖南)사람과 뚜렷하게 다르다. 기본적으로 군사적 기질이 없고 소상업면에 아주 훌륭한 소질이 있어 장강 중.하류 지역의 소규모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호남사람은 상업정신이 부족한 반면에 군사적 기질이 매우 특출하다. 강서 사람은 호남사람 처럼 굳세고 건전하지 못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부드러움도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로 냉정하고 속이 좁다.

6. 복건
복건성 주민들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지는 산을 사이에 두고 풍속습관이 다르다. 연해지역 사람들은 개방,진취적이며 모험심도 강하고 장사도 잘한다. 특히 임기 응변에 능하다. 그러나 내지의 산간지역사람들은 보수적이며 대단히 배타적이다.


□ 화중.화남 사람의 특성

1. 하남
고대 문화의 중흥지였던만큼 보수적이며 봉건적이다. 진취성이 약하고 배타적이라 현대에 들어와서는 낙후되었다. 불교 무술인 소림사 권법의 창시 지역이며 많은 사람들이 운동삼아 권법을 익힌다.

2. 호북
호북인들은 속임수를 잘 쓰며 큰소리 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어떠한 일이 일어 나도 죽겠다는 소리를 내지 않는 독한 사람들이다.

3. 호남
호남성은 옛날 초나라의 땅으로 초나라 전사의 자손답게 중국 군인들의 고향이자 많은 관원들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그들은 충실하고 정직하며 강렬한 자아의식과 거친 반항정신은 이곳 주민들의 특성이다.

4. 광동
광동성에는 언어,피부색,생김새,사회적 지위가 서로 다른 많은 종족들이 뒤섞여 있다. 그들에게는 민족적인 활력이 넘쳐 흐른다. 사내답게 먹고 일하며, 진취적이고 태평스럽다. 또한 그들은 돈을 헤프게 쓰고 싸움을 좋아하며, 모험을 좋아하고 성질이 급하다. 그들은 뱀을 먹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남부 중국에 나라를 세웠던 고대 중국인들의 피가 많이 섞여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광주와 그 부근에 있는 개화(開化)종족은 지능,기업정신,미술 등의 면에서 기타 중국인보다 우월하다. 그들이 만든 공업제품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유럽에 까지 전해졌다. 광동 사람들은 총명하고 계산이 빠르며 장사에 일가견이 있다.

5. 광서
광서 사람은 문화 수준이 낮고 반항심이 강하며 반란적인 경향이 있다. 소수민족 자치구이므로 소수민족의 언어,문화,풍습을 강하게 보존하고 있다.


□ 서남 지방 사람의 특성

1. 사천
일반 중국인에 비하여 순박하고 질서와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비교적 많다. 주로 농업,가내공업,소상업,운수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천의 산과 물이 다른 성(省)들에 비하여 좋은 것처럼,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 방식과 온화한 성격은 모두 탁월하다.

2. 귀주
이곳은 묘족(苗族)이 많은 지역이며 이들 소수 민족들은 손님 접대하기를 좋아한다.

3. 운남
주로 산간지역에 살기 때문에 성격이 소박하고, 소수 민족의 복장,풍습,언어를 잘 보존하고 있으며 낙천적이다.

4. 서장
서장 자치구에는 주로 장족(藏族)이 거주하고 잇다. 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다. 순박한 성품의 그들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진지하고 속임이 없다. 문화,사상,풍습은 모두 티베트 불교(라마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 서북 지방 사람의 특성

1. 섬서
섬서 사람은 산서 사람처럼 철도,숫자,무게 관념이 발달하여 금융업 방면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금융업 재능면에서 섬서 사람은 산서 사람에 비하여 약간 뒤떨어진다. 전국에서 큰 금융업은 모두 산서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반면에, 섬서 사람은 무역과 작은 규모의 상업에 열중하고 있다.

2. 감숙
매운것을 잘 먹고 소박하며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는 인내심이 강하다. 중국 고대문화의 출토품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지역의 하나로서 중국 고대 문명의 이동 연구에 중요한 지역이다.

3. 영하
회족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슬람 종교와 중국 문화가 접합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배타성이 강하며 소박하다. 인사성이 밝고 모래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인데도 아주 청결하게 산다.

4. 청해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으며 장족이 많기 때문에 라마교와 연관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성격은 보수적이며 변화를 싫어하고 성품은 소박하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다.

5. 신강
신강 자치구에는 주로 위구르족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은 술과 춤,노래를 즐긴다. 성격이 거칠어 야만적 기질도 지니고 있다. 반면에 성격은 호탕하며 누구와도 아주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의,식,주 문화는 중앙 아시아 계통으로 중동 아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지역은 밤 10시가 넘어야 해가 진다. 따라서 그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북경보다 두 시간 늦은 신강 시간을 따로 사용한다.


김종순: 지방별 중국인의 성격특징 -[11/2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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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10-30 (목)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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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테일러(선교영화/한글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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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10-30 (목)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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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목사(에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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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10-11 (토)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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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와 문화충격

선교사와 문화충격

 서론 : 낯선 곳, 이제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새문화에 진입할 때 선교사는 기대감에 차서 별로 겁이 없다. 자신의 꿈과 비전을 성취하고, 준비된 것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파송예배와 출국, 현지 초기정착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흥분은 계속된다. 그러나 점차 일상으로 돌아와 새로운 문화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자신이 생존하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기대하던 꿈이 깨어진다. 낯선 곳에서 낭만과 흥분으로 가득한 시간이 지나고 이곳이 이제는 자신이 살아야할 새로운 고향임을 인식하는 현실감을 갖는 시기가 찾아온다. 이때가 문화충격을 가장 극심하게 경험하는 시기이다.

  문화충격은 문화차이에서 기인한다.1) 문화차이는 다른 음식과 주택, 언어, 문안인사 등의 예절, 관계형성방법, 세계에 대한 사고방식, 시간에 대한 인식에 기인한다. 이는 때로 우스운 일을 만들기도 하고 곤란한 일을 만들기도 한다.

  문화충격이란 어릴 때부터 배워온 모든 문화적 틀과 지침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못할 때 경험하는 방향감각과 상실을 의미한다. 문화 충격은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다. 충격의 심각성은 문화간의 차이정도, 개인의 성품,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방법들에 따라 달라진다.2) 또 문화충격은 그 나라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새로이 적응해야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이다.

 

I. 문화충격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

  

  문화충격은 선교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다른 문화권으로 가는 모든 사람이 문화충격을 경험한다. 문화충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3)

  1. 문화충격이란 실재한다.

    문화충격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주위사람들의 이해와 동정을 받을 만하다. 현지인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선교사들은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고생스런 체험을 해왔기 때문이다. 신임선교사는 어느 정도 면역성을 기를 때까지 보호되어야 한다. 문화충격은 선교사들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것이 실제적인 경험이 된다. 이미 보아온 책이나 잡지, 비디오자료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이 피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2. 문화충격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타문화권으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문화충격을 경험한다. 낯선 상황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고립감을 느끼게 되고 외로워하며, 우정과 이해를 갈망한다. 외국에서 살아보거나 여행해 본 사람은 누구나 문화충격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3. 문화충격은 그 정도가 다양하다.

    친숙한 환경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질수록 충격은 심할 것이다. 동일문화나 유사문화권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상황에서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4. 사회적 수준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내려가는 것보다 더 쉽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어도 잘 살지만 부자가 하루아침에 가난하게 되면 잘 견디지 못한다. 선진국으로 유학간 개발국가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고 머무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풍요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교사에게 문화충격이 심각한 이유이다. 선교사들이 본국의 부유함과 풍요를 떠나 가난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문화충격을 야기시킨다.

 

  5. 문화충격은 보통 남편보다 아내에게 더 심하다.

    남편에게는 일이 가져다주는 기분전환이 있다. 여러 곳을 방문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더 좋은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아내는 수많은 일상생활의 불편들을 남편보다 더 많이 견디어야 한다.

 

  6. 문화충격은 여러 단계로 일어난다.

    첫 번째 충격은 피선교지에 도착 즉시 발생한다. 기후와 가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경험한다. 그러나 곧 이같은 증상은 극복이 된다. 더 큰 것은 두 번째 것으로 처음에는 열정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들이 점차 심각한 현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생긴다. 이 과정을 거쳐 현지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할 때면 선교사는 다시 안식년으로 본국에 돌아오며, 역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가난에 대한 충격은 풍요에 대한 충격으로 바뀐다. 실제로 이 단계의 충격은 과소평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종종 은퇴선교사들이 본국보다 섬기던 나라에 머무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이다.  

 

  7. 문화충격에 대한 선교사들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난다.

  선교사는 제각각 이다. 기후나 생활환경에 대한 반응이나 선호도와 기호(嗜好)등이 다르다. 이는 문화충격에 대한 다른 반응을 나타내게 한다. '한 사람에게는 약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선교사도 전체적인 환경에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다.

 

II. 문화충격의 원인

 

  문화충격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4)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기 때문에 그 '다른'것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1. 언어충격

    가장 처음 부딪히는 것은 의상소통의 불능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수단을 상실한다. 이미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익숙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애를 써야하고 계속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언어충격은 사람들을 악순환으로 몰아넣는데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고, 어울리지 못하면 더더구나 배울 수 없다.  통역을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너무나 힘들기도 한다.

    언어문제는 문화충격을 더 심화시킨다. 선교사는 언어학교 시험에 통과해야만 한다. 언어공부는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더욱 부담을 준다. 대부분 영어를 매개체로 하여 현지어를 배우게 됨으로 영어와 현지어를 동시에 배워야 하는 입장이다. 언어공부는 가족 내에서 특히 남편과 아내가 다른 환경에서 언어습득을 하게 됨으로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남편보다 뛰어난 아내나 공부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갖지 못한 아내는 격려가 필요하다.

 

  2. 일상생활의 변화

    본국문화에서 장보기, 요리, 은행일, 세탁, 우편물 처리, 치과치료, 크리스마스 장식 구입, 여가 등을 효율적으로 수행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는 단순한 일조차도 커다란 정신적 부담이 되고 굉장히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초기에는 삶이 단순히 생존하기 위한 갈등이 되곤 한다. 모든 시간을 요리, 세탁, 집수리, 장보기 등에 소모한 것처럼 보인다. 목적은 사역인데 그 일에는 시간을 내지 못하고 좌절감만 커진다.

    사소한 불편도 한몫을 한다. 외국에서는 아무것도 본국에서처럼 잘 되어나가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수돗물 이 제한적으로 나오거나, 전기가 중단되거나, 전화연결이 잘되지 않거나 하는 등의 일은 사소한 것이지만 마음의 평강을 깨뜨린다.

    문화충격은 이같이 낯익은 문화적 신호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신호를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5) 본국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신호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드리고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다시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잉분노와 염려에 시달리게 된다. 언제 악수를 하고, 언제 어떻게 팁을 주며, 어떤 물건을 사며, 초대에 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구분할 수 없으며, 제스츄어, 얼굴표현 등을 이해할 수 없음으로 문제가 생긴다.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온 사람은 담이나 대문도 없이 언제든지 사람들이 들락거리거나 복잡하게 머물거나, 생활자체가 다른 사람의 관찰 대상이 되는 등 사생활이 없어질 때에 어려움을 겪는다.6)

    시간에 대해서도 서구의 시간중심의 문화와 달리 정확한 시간준수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에는 혼란이 온다. 더군다나 어떤 일에 대해서는 시간을 준수하나 다른 일에 있어서는 으레 늑장을 부리는 등의 차이가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7)

 

  3. 관계의 변화

    사람들은 관계를 중심으로 삶을 이루어간다.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상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에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본국에서 보다 훨씬 어렵다. 배우자와 자녀도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를 지니고 도움을 호소하게 되고, 도움이 되기보다 자신에게 오히려 신경을 건드리는 존재가 된다. 선임선교사들은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분주하기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선교사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함부로 드러낼 수도 없다. 현지인과의 관계는 더 긴장되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아지고, 영적으로 무미건조해지고, 외로움에 시달린다. 심지어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기도 한다. 본국에서는 직위, 학위, 사회적인 위치와 다양한 회원자격으로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았던 자신이 마치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과도 같이 된다. 때로는 현지인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하다.

 

  4. 이해력 상실

    새로운 문화권에서 이전의 지식중 대부분은 쓸모 없거나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이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이 어긋날 때 누구나 좌절하게 되는데 이는 삶이 통제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의미상실로 이어지는데 이는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5. 감정과 가치관의 혼란

     문화충격은 감정과 평가의 방향상실을 초래한다. 음악은 익숙지 않은 소리를 내고, 음식은 이상한 냄새가 나고, 오락은 유치해 보인다. 본국에서 누렸던 익숙한 것들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또한 타문화 권에서 발생하는 좌절감에 부딪히게 된다. 향수병, 자기기대에 미치지 못함으로 갖게되는 정죄감, 내적인 분노가 쌓여간다. 가치관이 달라 충돌하거나 비난을 받게 된다. 현지인의 일상이 부도덕하고 화가 난다.

 

  6. 기후와 자연환경

    기후의 변화는 생활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연중 무더운 열대지방, 반대로 추운 지방, 사계절이 뚜렷하거나 연교차가 심한 지역 등 다양한 지역은 다양한 삶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습기가 가득한 더위에 시달리거나 건기와 우기가 명확히 구별되어 수개월씩 고통을 받으면 선교사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기진 해 버린다.

 

  7. 가난, 기아, 질병8)

   극도의 가난과 생존단계에서 살아가는 빈민가의 사람들, 거지들과 생활수단으로서의 도둑질과 좀도둑질은 가난을 경험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도와주어도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기아문제와 부족하거나 형편없는 의료시설도 상당한 충격을 주게된다. 먼지와 불결함도 영향을 미친다.   

 

III. 문화충격의 증상

 

  흥미상실, 집 생각, 불면, 식욕부진, 집중력의 결여 등인데, 피로가 가장 흔한 증상이다.9) 처음에는 흥미 있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3-4개월 후에는 피곤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기 싫고 선교지에 온 것이 잘 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직업적인 면에서 근심이 늘어간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본국에서 익숙하게 하던 일도 두려워진다. 이는 자기방식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 이르고 퇴행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화충격은 때로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에서 기아와 빈곤 등 사회적인 문제를 직면할 때에 갈등을 겪게 된다. 무기력해지거나 비상식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분노로 표현되어 선교회나 선교지도자, 현지지도자에게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또 문화충격은 상한 감정을 갖게 한다.10)

  캐리 시드너는 탈진 상태의 사역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감정적 피로의 징후를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 사역과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관심의 결여와 동기력의 상실, 일정기간의 침체, 영적인 메마름, 일상적인 업무를 잘 수행치 못함, 잠을 잘 못 이룸, 신격과민으로 어려움을 겪음, 지나치게 피곤함, 신체적인 문제 : 가슴이 답답함, 두통, 편두통, 신체 여러 부분의 근육 긴장,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 불규칙한 심장박동, 혓바늘이 돋거나 입안이 험, 식욕이 없음, 지나치게 예민한 감정, 억제할 수 없는 눈물, 비뚤어진 전망.11)

   허버트 케인은 문화충격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12) 먼저는 스트레스의 발병이다. 토마스 홈즈와 마수수가 고안한 스트레스 지수<표1>13) 측정에 의하면 대부분의 선교사가 스트레스가 매우 치명적일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해에는 재정상태, 직종, 지리적 위치, 휴식방법, 교회생활, 사회활동, 식생활 습관 등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한다. 여기에 젊은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임신, 일상생활에서의 언어 배우기 등이 상당한 부담을 준다. 실제 수치로도 약400정도가 된다. 14)

  

<표1> 생활 변화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 지수

사건의 종류(스트레스 지수)

1.배우자의 죽음(100) 2.이혼(73) 3.별거(65) 4.수감생활(63) 5.가족의 죽음(63) 6.부상이나 질병(53) 7.결혼(50) 8.해고(47) 9.부부간의 재결함(45) 10.은퇴(45) 11.가족건강에 생긴 변화(44) 12.임신(40) 13.성적인 문제(39) 14.새가족이 생김(39) 15.새로운 사업에 재적응(39) 16.재정상태의 변화(38) 17.가까운 친구의 죽음(37)18. 직업을 바꿈(36) 19.배우자와 말다툼(35) 20.담보설정(31) 21.대출상환일이 다가옴(30) 22..직장에서 다른 일을 맡음(29) 23.자녀가 집을 떠남(29) 24.시가 혹은 처가와 문제(29) 25. 개인적인 뛰어난 성취(25) 26.아내의 취업이나 사직(26) 27.학교의 개학이나 종강(26) 28.생활환경의 변화(25) 29.개인습관의 변화(24) 30.상사와의 갈등(23) 31.근무시간과 환경의 변화(20) 32.거주지의 이동(20) 33.학교전학(20) 34.여가생활의 변화(19) 35.교회생활의 변화(19) 36.사회활동의 변화(18) 37.천만원 이하의 대출(17) 38.잠자는 습관의 변화(16) 39.함께 사는 가족수의 변화(15) 40.식사습관의 변화(15) 41.휴가(13) 42,.크리스마스(12) 43.사소한 법률위반(11)  

다음에는 신체적 질병이다. 커다란 스트레스의 공통된 결과는 신체적 질병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에는 만성두통, 위궤양, 요통, 고혈압, 심장마비, 만성피로 등이다. 특히 외국에서의 질병은 두려움을 더한다. 적절한 의료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건강은 더욱 심각한 요소가 된다.

   또한가지는 심리적 영적 우울증이다. 스트레스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우울증과 실패감이다.

비현실적인 기대감에 짓눌린다. 불행하게도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면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지만 문제는 더 악화된다.

 

IV. 장기간의 문화충격과 역문화 충격

 

  장기간의 문화충격은 흔히 질병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의사나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증상의 첫째는 극심한 고향생각이다. 모든 선교사가 고향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약간의 휴식을 취하면 벗어난다. 심하면 완전히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고향에 대한 것뿐이고, 우울한 장문의 편지를 집에 보내거나, 집에 전화를 자주하고, 현지에 적응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둘째는 새문화로부터의 후퇴이다. 일상적인 일조차 미뤄두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외부와의 접촉을 꺼린다. 셋째는 드물게 도피하는 것으로 친구에게 가거나 본국행 비행기를 탄다. 넷째는 우울증이다. 불면증과 식욕상실, 극도의 쇠약감이 찾아온다. 사고도 우울하고 무력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런 경우는 너무 늦게 까지 방치하지 말고 의사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효과적이다.15)

  재입국 스트레스(Re - entry stress)는 역문화 충격이라고도 한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생활하고 본국에 돌아오면 역문화충격(Re-entry Culture Shock)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보다 본국의 문화는 더 많이 변했고 우리 자신도 변했다. 초기 흥분이 지나면 자신을 재정립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며 짜증과 좌절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편협해 보이고 그들은 선교사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지 않고 고작 선교사에게 엉뚱한 질문만 한다. 초기에는 방어적으로 반응하면서 지역관습에 분노하고 비판적이 된다. 때로는 본국에 돌아오지 말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이 초기 시기는 '빠져버린 페이지' '진공' '사별과 같은 이민'으로 묘사된다. 후에는 문화를 변화시키는 시도를 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면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원래 문화에 재적응된다.16)   

  역문화충격은 문화충격만큼 심각하다. 특히 외국에서 오랜 기간 지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선교사는 이전에는 외국이었으나 이제는 거의 고국이 되어버린 익숙한 환경을 떠나 돌아온다. 문제의 심각성은 선교사가 재입국시에 이러한 것을 예상치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선교지에 깊이 젖어들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떠나온 고국에 대해서는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어떤 두려움도 갖지 않는다. 고국에서 그들은 '고국문화로부터 밀려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버려진 존재처럼 느끼게 된다.

  재입국은 일시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일시적인 재입국은 안식년, 휴가, 본국사역 등이다. 영구적인 재입국은 다시 해외로 나갈 의도가 없이 귀국하는 것이다. 단기사역을 마치고 귀국하거나, 중도에 사정으로 귀국하거나 은퇴 등의 경우이다.17)

 

V. 문화충격 다루기

   

  일반적으로 문화충격에 대한 다양한 정도차이와 변수들을 공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18)

참여도 × 가치 차이 × 좌절 × 기질적인 차이

--------------------------------------×안알려진 요소 = 문화 스트레스의 총양

받아들임×의사소통×감정적 안정 ×내적인 영적 자원

1. 문화충격을 증가시키는 요인들19)

   문화충격을 증가시키는 요인은 참여도가 낮거나 가치차이가 크고, 좌절감을 자주 경험하고 기질적인 차이가 클 때 증가하게 된다.

  1) 참여도(Involvement)

     새로운 문화권에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교사가 실제 문화에 참여하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과 건설적인 방향에서의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실제적인 참여가 이루어질수록 스트레스는 줄어들게 된다.  

  2) 가치차이(Value Difference)

     선교사에게 있어서 이것이 모든 어려움의 원인이 되는 중심적인 기독교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가치관의 차이로 청결에 대한 생각, 책임감, 시간의 사용 등에 관한 것이다. 때로 겉으로 표현되는 문화 양식은 비슷하나 내용은 크게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선교사의 혼란은 더욱 커진다. 선교사가 자기의 문화가 유사하다고 느끼는 문화에서 다른 점을 발견할 때에는 전혀 다르다고 인식한 문화에서 경험하는 문화충격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 된다.

  3) 좌절(Frustration)

     문화적인 차이와 일상적인 호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선교사의 사역을 방해하는 작은 좌절의 원인이 된다. 선교사가 생각하는 목표와 현지인들이 기대하는 목표가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실수하는 것은 갈등을 일으키고 좌절감을 갖게 한다.

   4) 기질적인 차이(Temperament Difference)

      개인적인 기질과 인격 성향의 차이는 동일한 타문화권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이게 한다. 수줍움을 타거나 수동적인 사람은 난폭하거나 열정적인 국민성을 가진 사람가운데 적응하기가 어렵다. 단기간의 여행에서는 새로운 문화에 다양하게 적응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 일정한 습관에 의존하며 규칙적으로 사는 사람보다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기 선교사의 경우에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2. 문화충격을 감소시키는 요인들20)

   문화충격은 수용성이 높을수록, 커뮤니케이션이 잘 될수록, 감정적으로 안정돼 있을수록, 내적인 영적 자원이 풍부할수록 줄어든다.

    1) 수용(Acceptance)

      선교지의 문화를 적절한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준다.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지적인 부분은 가르침을 받거나 훈련을 통해 선교지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관습과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과정이다. 지적이지 않은 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도덕과 가치관 훈련을 통해 형성하는 것으로 더욱 어렵다.

    2) 의사소통(Communication)

       언어적, 비언어적 의사소통방식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방면에서 충격을 감소시켜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독과 외로움, 고립감을 갖는데 다른 사람들과 교류함으로 이를 상당히 해소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현지에 대한 상호이해를 증진시키며, 결과적으로 좌절과 염려, 거부감등을 최소화한다. 또 커뮤니케이션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3) 감정적 안정(Emotional Security)

      감정적인 안정감은 자신의 개성이나 성향을 타문화에 적응하면서 바꾸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선교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타문화적응은 자주 자신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는 더 큰 열등감이나 불확실감을 갖게 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것이다. 또 남편은 일반적으로 사역에서의 만족을 얻기 때문에 가정일에 메이는 아내가 훨씬 더 심하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수록 이전에 가지고 있던 문화적 요소의 저항이 거세질 것이다.

    4) 내적인 영적 자원(Inner Spiritual Resources)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트레스를 잘 견디거나 줄일 수 있다. (벧후1:3-4, 빌4:13) 이는 믿음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재무장과 각성을 통해 계속 일깨워야 한다.

     문화적인 스트레스 + 문화적인 혼란 + 다른 스트레스 = 총 스트레스

  이외에도 알려지지 않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적으로 스트레스를 증가시킬 것이다. 또 이 문화적인 스트레스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선교사에게 더해진다.21)

 

  3. 문화충격을 감소시키는 원리22)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충격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오도넬의 제안을 중심으로 살피려고 한다.

    1) 문화적인 스트레스를 인식하라

      그 자체를 인정하고 인식해야 한다. 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다.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있고, 그가 약간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인다고 할 때에 사람들은 그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를 이해할 수 잇다. 마찬가지로 새문화에 들어간 사람은 그 자신이 문화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이해해야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다가는 나중에 문화에 대한 부담감, 질병, 감정의 파괴 등과 같은 상황을 맞게 된다.

   2) 휴식을 취하라

     가끔은 일상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맞아야 한다. 가벼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운동이나 등산 등을 하는 것이 좋다.

   3) 좌절감을 줄여라

     좌절감은 상대적으로 성취감을 높임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선교사는 커다란 이상과 야망을 가지고 선교지에 간다. 목표는 반드시 현실적인 상황에 기초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 목표로 인하여 좌절을 반복되고 결국은 감정적인 갈등이 깊어질 것이다

   4) 수용적인 태도를 쌓아라

     문화를 자각하고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해야한다. 어떤 문화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이 명령하는 필수적인 명령 외에 이 세상에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를 고집하지 말고 다른 문화에 대해서 많이 읽고 배우는 태도가 중요하다.

   5) 의사소통기술을 개선하라

    실제로 언어습득이 커다란 스트레스가 된다하더라도 언어를 배우는 것은 장기적인 면에서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또한 비언어적 의사소통방법을 배워야한다. 어떤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해서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제스츄어나 표정, 규칙과 예의, 그들의 삶 속에 있는 다양한 의미를 이해할 때에 가능하다.

  6) 정서적 안정을 강화하라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크게 인식하라.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상황을 나누어야 한다. 동료들을 통해서 서로 격려함으로 강화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동안에 받는 내적인 공격이 있을 때에 이해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자기확신이나 자존감도 중요한 요소이다.

  

VI. 문화적응 단계23)

 

   타문화권 적응이란 타국의 낯선 생활터전에서 정보, 지식, 방법을 터득하는 외형적인 적응에서 끝나지 않는다. 물론 외적인 모방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내면세계의 변화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적응과정은 긴 여행과 같아 항상 직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요한 과정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1. 환등기 관람단계

    마치 환등기로 비친 이국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 첫 번째 반응은 매력이다. 바라보는 각 나라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재 시각화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벽면에 고정된 세계이다. 때로는 확대경과 망원경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동경하거나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그에게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다.

 

  2. 관광객단계

    움직이지 않던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단계로 모든 것이 자기에게로 향해 몰려오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큰 것, 작은 것, 아름다운 것, 추한 것, 강렬한 색, 죽은 색, 뚱뚱한 것과 엷은 것을 경험하며 자극을 받는다. 신기하지만 도무지 못살겠다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고 수첩에 기록을 하기도 하고 귀중한 추억이 된다. 대체로 이 시기는 짧으면 3박4일이고 길어야 6개월이다.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듯이 권태와 향수가 찾아온다. 과거의 편안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흔히 이 단계는 허니문단계(Honeymoon Stage)로 불리기도 한다. '모든 것이 똑같다'라는 느낌을 받으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3. 영웅적 입문단계

    이 단계는 생활인으로 살려는 단계이다. 자기 눈으로 보는 세계를 만져보고 호기심이 현실로 변해 가는 것을 경험한다. 퇴색되어진 회색세계는 큰 자극이 없이 권태가 찾아온다. 혼란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느끼며,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언어와 역사를 배우고 현지에 있는 선교사들의 태도를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신은 새로운 사명에 불탄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영웅적 몸짓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점점 지치고 힘들어지고, 두통, 소화불량, 신경질 등의 증상이 생긴다. 고독해지고 자신이 부적당하다고 느낀다.  

 

  4. 소시민권 취득단계

    새로운 세계가 쉽게 내가 상대할 대상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야할 세계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직은 두 세계 가운데 공존한다. 그러나 그 기반은 언제나 본국에 둔다. 가끔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려는 시도를 하지만 피상적이고 가슴에 닿지 않는다.

 

  5. 현미경 관찰단계

    현미경으로 살피듯이 현지 문화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기를 배운다. 겸손하게 현지 문화에 대해 존경을 표하기 시작한다.

    대체로 이 단계에서 선교사는 현지문화에 대해서 취할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첫째는 문화에 대한 이질적 적응이다(Fight the culture). 문화 속에 살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아있다. 현지인들이 선교사가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현지인들은 선교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에 별 관심이 없다. 둘째는 좌절하고 귀국하는 것이다(Flight). 셋째는 현지에 적응하여 현지문화를 편하게 느끼는 것이다(Become a Belonger). 현지인들도 선교사가 외국인이라는 사실도 잊는다. 사람들을 이해하고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향상된다. 넷째는 현지인화(Go Native)하는 것으로 자문화를 포기하고 현지인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6. 모방단계

    현지인처럼 노력하는 단계이다. 한 세계를 만들어 보기 위해 노력한다. 옷도 음식도 사고방식도 본받아 보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들 중 하나로 동화되기 위해 노력한다.

 

  7. 성육화의 단계

    그들의 삶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하나의 이상적인 이미지로 살아가는 단계이다. 현지인보다 그들의 내적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살고 있고 더 이상 모방이 필요하지 않다.

 

VII. 문화충격의 극복

 

  문화충격 때문에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경우는 드물다. 문화충격을 어떻게 극복하는가?24)

 

  1. 예수님과 성육신을 기억하라

    예수님은 최초의 선교사이자 위대한 선교사였다. 선교사가 받는 문화충격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을 주님은 경험하셨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보잘것없이 태어나신 예수를 기억하고 모범을 따라야 한다.

 

  2. 문화충격이란 정상적인 반응임을 인식하라

    문화충격은 영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타문화권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의 부족이라고 비난받거나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염려를 인정해야 한다. 새문화에 도착하면 불확실성이 내재하므로 새로운 상황을 겁내는 것은 극히 정상적이다. 문화충격의 파괴적인 부분은 구체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이다. 지나치게 병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3. 다른 사람들이 극복해 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좌절의 심연에서 선교사는 최악을 상상하기 일수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극복될 것이며, 승리와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했으며, 살아남았다. 선교단체에서 정한 직무표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책임을 지나치게 경직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한다.

 

  4. 가능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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