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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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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8-27 (수) 16:23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4702    
좋은선교사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은 선교지이며, 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마음은 곧 선교사이다'.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의미에서 선교사인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타문화권 선교사는 아니다. 즉 타문화권에서 복음전도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로서의 자질과 자격'이 요구된다고 본다.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며, 복음전파자이고 사랑의 사도이다. 평화의 전달자이며, 타문화를 인내로 견디는 자들이다.

  선교사들과 대화해보면 그들이 부르심을 따라 사역을 준비하는데 여러 가지 요소가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과거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무장되고 준비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으나 선택받은 이는 적다. 선교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선교사를 만드는 과정은 길고도 어렵다. 그러나 마침내 이룰 때에는 그 무엇보다도 큰 성취감과 상급과 보상이 있다.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지금까지의 한국선교는 가능한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데 집중해왔다. 그러나 점차 선교사들의 수가 증가하고 간혹 실패하는 사례도 있어서 점차 선교사 후보생을 보다 잘 선택하여 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더욱 이를 피부적으로 느끼면서 준비되어지고 갖추어진 사람을 보내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선교사의 선발과 훈련에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선교사의 도중하차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선교사의 탈락률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1992년에는 35단위(가족 혹은 독신)가, 93년에는 71단위가, 94년에는 79단위가 사역을 종료하였다. 이중에 상당수는 예방 가능한 원인으로 귀국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비율로 같은 기간에 파송된 선교사의 18.3%에 해당하는 탈락률이다. 즉 100명이 선교사로 나가면 18명이 중도귀국하며, 11명은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로 귀국한다. 한국선교정보센타의 통계에 의하면 26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7가지 문제는 그 비중을 따라 살펴보면 동료선교사와의 문제, 건강문제, 사역의 변경, 소명의 결여, 본국의 지원부족, 본부와의 이견, 문화적 부적응 등이다. 또 실제적인 이유에서는 49.2%가 사역과 관계된 문제보다는 자신과 동료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된 문제로 말미암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교사가 잘못되었을 때 입는 피해  선교사가 잘못되거나 중도탈락하면 개인뿐 아니라 가족, 교회, 동료선교사, 현지인에게까지 영향이 미친다.

 

  1. 선교사 자신과 가족에게 희생이 따른다. 시간낭비, 본국생활에의 재적응, 다른 직무나 직업을 찾아야하는 문제, 깊은 실패감 등을 해결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의 상황이나 이해가 선교사의 탈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본인도 본국에 귀국하는 것을 꺼리는 상황도 발생한다.

 

  2. 선교지의 선교사와 본국의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도 희생이 따른다. 동료선교사를 곤란하게 하거나 낙심하게 하고, 본국의 교회와 선교본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돌출행동을 하거나 물의를 일으키는 선교사로 인해 다른 선교사가 심각한 타격을 받기도 하고, 이는 곧 본국의 파송하거나 후원하는 교회의 선교열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고, 좋지 못한 선례로서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선교회의 사역에 지장을 초래한다.



  3. 선교지가 감당해야하는 희생도 있다. 선교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잘못된 신앙을 가르칠 수도 있고 후임자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현지 성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현지교회나 교인들에게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더불어 교회와 복음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할 수도 있는데 이를 시정하려면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한다.



  4. 재정적인 희생이 따른다. 오늘날의 선교는 고비용 사역이다. 이를 파송교회와 후원교회와 개인을 통해 조달했는데 열매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실제로 선교사가 정상적인 선교사역을 하기까지는 국내훈련과 이주, 초기정착과 언어훈련 등에 막대한 비용이 소비된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역을 못하고 중단할 때에는 다시 새로운 선교사를 위해 그만큼의 시간과 재정이 지불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의 선교에 희생이 요구된다. 선교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어떤 기준을 가질 것인가? 대부분의 선교전문가들이 좋은 선교사의 자격조건으로 꼽는 것은 크게 6가지 영역에서 이다.



  학문적 자질

  선교사가 어떤 종류의 사역을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행정직이나 전문인선교사의 경우 반드시 신학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개척 및 교회관련 사역을 할 경우는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바람직하다. 얼마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인가?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대학교교육이상의 수준을 요구한다. 좋은 교육적인 배경은 사역자에게 필요하다. 자기 성취나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고자 하는 시야를 갖고 가능하다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



  선교경험과 훈련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단기 선교여행 등의 타문화경험이 있으면 좋다. 또 복음주의적인 선교훈련기관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면 적절하다.



  사역경험과 직업

 어느 정도 사역을 경험해본 사람이어야 한다. 특히 전도와 제자훈련, 경건의 시간, 개척 및 교회사역의 경험 등이 중요하다. 전문인의 경우는 전문적인 분야의 경험과 자격이 별도로 필요하다.

 이외에도 전문인의 경우에는 선교와 직업 모두에 대한 확신, 직업 능력, 일과 윤리에 대한 성서적 관점, 건전한 자립정신과 상호의존에 대한 자질이 요구된다.



  신체적 상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어야 하고, 신체적으로 질병이 없고 건강상태가 좋아야 한다. 또 사역이나 상황에 따라서 전임사역자의 경우에 연령제한을 두기도 한다. 선교지에는 건강한 사람도 쉽게 피로해지고 건강의 어려움이 올 수 있다. 최근의 한국선교사가 도중 귀국하는 경우의 대부분이 신체적인 질환인 것만 보아도 건강한 신체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영적인 자질

  기본적인 복음교리를 확신하고, 구원받은 이후에 일정기간 꾸준히 성장한 것이 주위사람에 의해 인정된 사람이어야 한다. 처음 믿는 자는 선교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성숙한 신앙과 경륜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확신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아래서 살아야 한다. 매일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절대주권을 배우며, 기도의 영역이 확장되어가야 한다. 건전한 교회생활을 통해 목회자와 다른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를 해야 한다. 자신의 영적인 은사를 확인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영적인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계속적인 자기 훈련이 있어야 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나누고 돌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함께 일하는 동역자를 사랑하고 현지인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특별히 이미 본국에서의 사역을 통해 사역의 성공을 맛본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충성되며, 신실하고, 언제든지 자신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인격적 자질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섬기려는 종의 자세로 임하고, 지속적으로 자기연마를 통해 성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융통성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것을 허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다른 사람과 쉽게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융통성이 없으면 주로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상황에서만 안정을 누리지만 융통성이 있으면 어디서든지 잘 적응할 수 있다. 융통성은 새로운 문화와 식사방법, 말하는 법, 인사하는 법, 옷입는 법, 상거래 하는 법 등의 생활방식에 재빨리 적응하는 것이다. 선교지는 자연환경의 변화도 심한데 일년 내내 춥거나 더운 지역이 있어 기후가 다르고, 음식이나 물이 불결해 보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비위생적이기도 하다. 모기 파리는 물론 쥐나 도마뱀이 많거나 소음이나 교통혼잡이 심한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잘 견디는 능력이 요구된다. 융통성은 선교사의 스트레스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한다.  

  정신적 안정성을 보여야 하고 스스로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하고,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유머감각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 감정을 적절하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매사에 인내하며, 선교지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인내는 필수적이다.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스트레스를 극복해 가며 선교지에서 생활하는 것은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엄청난 어려움과 압력을 견디어 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건강한 가정을 이룬 사람으로 부부생활에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가족관계의 어려움은 부모와 자녀관계나 부부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선교지에서 남편과 아내는 역할이 많이 바뀌고 때로 아내가 더욱 힘든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관계가 안정적이어야 하며, 현지에서는 그 갈등이 커지고 감정의 골의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정직하여 도덕적으로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 특별히 편견과 독선, 우월감을 갖지 말아야 하고 기꺼이 명령을 따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겸손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 항목이다. 생활태도가 검소해야 한다.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다양한 대인관계에서 원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한국선교사의 강점과 약점

 21세기 세계선교에서 2/3세계선교의 선두주자로서 한국선교사의 책임과 위치가 부상하고 있다. 세계를 누비는 한국선교사의 강점과 약점을 살피고자 한다.



  강점

1. 인내력과 지구력

  많은 고난과 고생의 경험이 있어서 인내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하던 시기에 이미 가난과 친숙해 있고, 여러 가지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생활해 왔다. 이는 남아있는 대부분의 선교지가 한국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상기할 때 큰 장점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라나는 세대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가난과 고생을 모르고 자란 세대로서 이와 같은 상황에 헌신할 선교자원으로 배출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2.. 인종적 친근감

  한국인이 아시아에서 사역할 때 서구인들과 달리 더 가깝게 느끼게 된다. 동일한 피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특별히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몽골, 중앙아시아의 사람들과 매우 유사하다.



3. 아시아에서 언어와 문화의 친밀감

  선교사역에서 현지어 숙달은 매우 중요한 관건인데 일반적으로 아시아 권에서는 언어를 빨리 배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자문화권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한자실력이나 비슷한 언어구조의 득을 보고 있고, 유사한 문화로서 비교적 초기정착이 용이하다.



4. 깨끗한 이미지

  서구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이미지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서 환영을 받기도 한다. 특히 서울올림픽 이후로 한국에 대한 위상이 많이 변화되었고, 아시아 각국이 한국을 경제개발의 모델로 여기고 있고, 한국의 국제사회의 위상이 변화하고 경제적으로 부흥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5. 인간관계에서의 유리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한국선교사는 다른 아시아인이 가지고 있는 관계중심의 사고나 내면의 심성에 일치하거나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6. 풍부한 사역경험

  한국선교사는 대부분 도시교회 사역경험과 교회개척의 경험이 있다. 점증하는 도시화의 추세에서 도시는 선교의 주요초점이 되고 있다. 서구선교사들이 대부분 한적한 작은 도시나 농촌출신인 반면에 한국선교사들은 도시교회에서의 다양한 사역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7. 경제적으로 적은 비용

  서구선교사에 비해 경비가 덜 드는 편이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서구선교사의 70%정도로 적은 비용으로 선교하고 있다.



8. 영적인 강인함

복음에 대한 역동적인 열정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고 영적 대결에 능하다. 조급하고 의욕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 열정은 이미 서양선교사들 사이에도 정평이 나 있다.



  약점



1. 문화적응

  한국인은 단일언어와 단일 문화권에서 자랐다. 선교에서 한국선교사는 서구 선교사가 만들어 놓은 선교사 문화와 현지문화 둘 다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한국선교사는 한국식이며, 초문화권 경험의 부족하여 선교지에 노출될 때 더 큰 문화충격을 받거나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타문화에 대한 자문화중심적인 판단으로 편협성을 보이거나 흑백논리나 독선과 배타성, 자기비하 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2. 언어

  영어를 모르면 현지 적응도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대개의 경우 영어를 매개체로 현지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영어와 현지어를 같이 배우는 것은 큰 부담이다. 기본적인 여행이나 생존에 필요한 언어를 익히는데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3. 가정생활

  선교사의 가정생활은 건강하고 안정적이어야 한다.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기는 하나 실제로 사역에서 가정생활의 균형과 배려가 한층 아쉽다. 전통적인 가족개념이나 역할이해로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이 놓인 특별한 상황에 맞는 건전한 가정생활이 필수적인데, 많은 경우 사역에 집중하다보면 가정이 소외되기 쉽다.  



4 협동, 동역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사역도 혼자서는 잘하나 팀사역은 정신과 경험이 부족하고 조직생활에 대한 적응력도 약하다. 타문화권 선교사역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거나 한계가 분명하다. 점점 협동사역, 공동사역의 추세로 나아가는데 교회이외의 조직생활의 경험이 거의 없는 한국선교사들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기도 한다.  자기연마를 통해  강한 성격을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본부의 규정이나 규칙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질서의 혼란이 온다. 때로 경쟁적으로 사역하여 동일지역 내에서도 반목과 질시로 중복 투자하거나 사역이 나누어져 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4  장기사역

  한국인의 빨리빨리는 이미 세계화가 되어 있다. 이 조급성은 선교지의 느슨함과 부딪힐 때에 선교사는 지치거나 상하게 된다. 선교는 장기레이스이다. 일 이년하고 그만 둘 것이 아니라면 보다 장기적인 계획가운데서 일해야 한다. 선교사역후 쉬 결과를 기대하는 선교사나 교회는 인내 부족으로 견디지 못한다. 또 조급하게 성과위주의 사역을 하다보니 건강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도중하자 하는 경우도 생긴다. 실제로 많은 한국선교사들이 휴식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좋은 선교사를 위한 훈련

 좋은 선교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단기간의 선교사의  훈련으로 사람전체를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에 훈련이전의 선발과정에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선교사를 위한 적절한 훈련은 약점을 감소시키고 장점을 활용하는 최선책이 될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의 강조

  한국선교사의 약점인 협동과 동역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특별히 공동체 생활을 통해 자발적인 통제와 규율준수, 스스로를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경험하고, 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사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인관계기술이나 의사전달기술을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팀웍의 문제는 앞으로 선교사의사역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성격 조정 훈련

  다양한 인성검사와 성격검사 방법을 통해 적절한 파악이 이루어져야하고, 그것을 토대로 예견되는 문제와 상황을 미리 경험하고 자신의 장단점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비형식적, 비공식적 교육의 강화

선교훈련은 단지 학교교육처럼 타문화권에 대한 학업처럼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선교학, 문화인류학, 선교신학, 선교역사를 배우는 것이 자동적으로 훌륭한 선교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적 성숙의 강조

선교사가 타문화권에서 적응이 어려운 이유중에 하나는 영적인 성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훈련은 단기간의 훈련으로 극복되기 어려움 부분이다. 그러나 꾸준히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관리하고 승리하는 법을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결 론

 좋은 선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부름 받은 이방세계가운데 펼치며, 일생동안 주와 동행하면서 그 사역을 성취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선교자원을 발굴하여 세심한 평가와 판단, 개관적이고도 공정한 선정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선교사의 파송과 배치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참고도서 목록

 선교사가 되려는 분들에게, 마이클 그리피스, 보이스사, 1983.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 허버트 케인, 백인숙 역, 두란노서원, 1987.

 선교학, 박영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타문화권 선교, 짐 츄, 네비게이토 출판사. 1994.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이태웅, 죠이출판부, 1996.

 한국선교핸드북, 한국선교정보연구센터 편, 한국해외선교회 출판부, 1996.

 The Making of a Missionary, J Herbert Kane, Baker Book House, 1987.


출처/세계선교훈련원
     
이름아이콘 차이나맨
2013-03-15 08:50
꼭  필요한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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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8-26 (화) 11:09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4174    
중국교회 ‘이주선교’로 복음화 확산
중국 교회가 선교에 나서고 있다.199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중국 가정교회의 ‘이주선교’는 새로운 선교 동력으로 현재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주선교’란 교회로부터 유사문화권 또는 타문화권으로 파송된 선교사 가정이 장기적으로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교회는 사역경험이 풍부한 부부 선교사를 선발,공동체 훈련을 시킨 후 각 지역으로 파송하고 초기 3년은 재정 지원을 해주고 그후 자비량 선교에 나서게 한다.선교사 대다수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변경지역,소수민족 지역 등으로 떠나 언어장애,이단의 훼방 등 어려움을 극복하며 교회 개척에 성공하고 있다.시창(西藏) 칭하이(靑海) 신장(新疆)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 스촨(四川) 광둥(廣東) 하이난(海南) 푸젠(福建) 장시(江西) 후난(湖南) 등 12개 성에 폭넓게 퍼져 사역하고 있다.

이주선교에 나선 교회들은 소수민족 선교는 물론 미얀마와 인도,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에 이르기까지 해외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연약하게만 알려졌던 중국 가정교회가 세계로 나갈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중국교회는 지난 100여년동안 지역을 뛰어넘어 선교사역에 힘써왔다.1949년 이래 정부의 반기독교 종교정책에 따라 선교 열기를 눌려왔지만 한족을 비롯,55개 소수민족을 향한 선교 열정은 남다르다.

중국교회의 100년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중국교회의 역동성을 짐작케 한다.중국 교회는 1900년 의화단사건 이후 자립(自立)과 자전(自傳)에 집중했다.1906년 상하이(上海)에서 세워진 ‘중국자립회(中國自立會)’의 딩리메이(丁立美) 왕정팅(王正延) 등 전도자들은 대중전도를 선도했다.1910년 산둥(山東)성 광원학교에서 창립된 ‘중화학생입지전도단’은 딩리메이의 지도하에 총단원이 1170명에 달했으며 그중 530명은 전도자로 헌신했다.

1911년에 창립된 ‘호남축호전도단’은 5년간 10만7000여 가구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 상하이 푸저우(福州) 등 각지에 선교단체를 세워나갔다.특히 1918년 전국 기독인의 역량을 결집,‘중화국내전도단’을 창립해 윈난성에서부터 헤이룽장(黑龍江)성 몽골까지 진출하는 등 선교범위를 확장해갔다.이후 1931년에 세워진 ‘보터리전도단’은 지즈원(計志文) 송상제(宋尙節) 등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전도자들을 배출,현재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중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해외선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29년 광시성 우저우(梧州)에 총본부를 둔 ‘중화국외전도단’이 결성된 이후다.이 단체는 1호선교사로 주싱훈(朱醒魂) 목사를 베트남에 파송한데 이어 린정예(林證耶) 렌광린(鍊光臨) 목사 등을 인도네시아를 파송했다.1930년엔 선교사 64명을 파송,남태양평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또 1940년대 중국내지선교회가 세운 서북성경학원 교수와 학생들이 중심으로 ‘편전복음단’을 창립,간쑤(甘肅) 닝샤(寧夏) 칭하이 시창 신장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하지만 1950년 신장이 중국에 점령되자 이 사역도 정체됐다.1970년대 후반 편전복음단의 사역자들도 한 사람씩 사역 현장으로 돌아왔으며 그들이 사역 초기 품었던 소망과 열정을 손자 손녀 중 일부가 계승,현재 카스에 정착해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한편 장구췐(張谷泉) 목사에 의해 창립된 ‘서북영공단’은 1947년부터 49년까지 신장 하미에서 사역에 힘썼다.하지만 1951년 카스의 사역자가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그후 장구췐 목사 등도 하미에서 체포됨에 따라 사역은 완전히 중단됐다.1970년대 들어 백발노인이 된 일부 서북영공단 사역자들이 시창으로 돌아와 가정집회를 시작,복음의 횃불을 지피고 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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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8-21 (목) 10:36
홈페이지 http://wwwmchina.org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4162    
中선교 총론은 있지만 동력 아직 부족 [국민일보]
오는 24일로 한·중 수교 11주년을 맞이한다. 올해는 한국장로교회가 1912년 총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11월 중국 산둥(山東)성 선교를 시작한지 90주년이 되는,선교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해이다.
현재 한국선교사 1000여명이 중국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초창기 재중동포
중심 사역에서 벗어나 점차 한족 선교로 옮겨지고 있다. 아울러 물량 중심,단기적 과시적 성과주의에
서 장기 프로젝트로 전환되고 있다. 수교 11주년을 맞아 중국선교 현황과 과제를 긴급 점검해 본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유형=1992년 이전 중국선교는 극동방송 등을 통한 방송선교,미국 한인교회의
중국선교사 파송,한국목회자의 조선족 교회 지도자에 대한 단기 훈련 등이 주종을 이뤘다. 80년대 설
립된 중국복음선교회 중국어문선교회 등은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에 대한 이해에 주력했다. 일부 선교
사들은 대만,홍콩,싱가포르를 중국선교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 본토사역을 준비해 나갔다.

한?중 수교는 중국선교 백화제방시대의 신호탄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중국기독교협회
와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등과 공식적인 선교채널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93년 감리교 김종구 목
사를 중국정부가 인정하는 선교사로 파송했다. 94년 당시 중국기독교협회 회장인 딩광쉰 주교를 초청
했으며 조선족 신학교인 동북신학원을 신축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교회 및 선교단체들은 비공식적인 루트를 선택했다. 제자훈련,신학교육,소수민족
사역,전문인사역,교회개척,사회복지 등 사역의 규모와 대상,지역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가정교회와
건강한 삼자교회와의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특히 모퉁이돌선교회,오픈도어선교회 등은 한국교회 및 홍콩의 복음증주협회 등과 함께 중국어간체자
성경,주석성경,전도지,성경강해집,지도자훈련교재,주일학교 교재 등을 중국으로 보내는 데 앞장섰다.


◇농아인 지식인 선교 및 공단사역 확대=중국선교 단체들은 길게는 2년,짧게는 6개월의 자체 훈련코
스를 통해 중국선교사역 개발,현장 사역실습 등으로 선교사의 자질 제고에 힘썼다. 또 조선족지역 편
중 사역에서 벗어날 것을 유도했다. 조선족 지역은 탈북자 선교의 주요기지로 변모해 나갔다.

90년대 후반 중국선교의 새로운 영역으로 공단사역 및 도시빈민사역이 대두됐다.
중국정부의 개혁개방정책 확대에 따라 변방 및 내지의 10∼20대 값싼 노동력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이
들에 대한 선교 동력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 각종 스트레스와 영양실조,직업병에 시달리는 허난
(河南) 안후이(安徽) 후난(湖南) 쓰촨(四川) 장시(江西) 구이저우(貴州) 출신 노
동자들에 대한 선교사들의 제자훈련이 진행됐다.

아울러 중국복음선교회,한국농아인교회 등은 농아인 사역을 개발했다. 지난 96년 중국에서 X지역에
처음으로 한국농아인교회와 미국 한인교회의 후원으로 농아인교회가 세워진 이래 10여개의 조선족 한
족 농아인교회가 설립됐다. 대만 등 중화권 선교단체들과 연대한 선교단체,UBF CCC 등 한국의 캠퍼스
선교단체들은 중국대학내 사역을 펼치며 지식인 선교 가능성을 높여갔다.

한?중 수교는 국내 중국인사역의 불을 당기는 데도 일조했다. 90년 재중동포의 친척 방문이 시작되고
94년 중국인 근로자들이 연수생 신분으로 대거 입국하면서 국내 중국인 사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어문선교회 등은 한국대학생선교회 등과 함께 ‘사랑의 집’ 사역을 펼쳐 4년간 150여명을 훈련
시켰다. 이들 중 뒷날 중국교회 지도자가 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천부두에 정박해 있던 중국 선박
에 승선해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90년대 중후반들어 중국노동자 사역을 위한 전문 교회와 신학교가
설립돼 ‘중국인에 의한 중국선교’도 준비했다.

하지만 한국교회 중 국내 중국인을 위한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숫자가 아직 미진한 상태다. 또
중국선교 총론은 나와 있지만 구체적인 동력은 아직 부족한 형편이다. 선교전문가들은 한국교회가 중
국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시기가 향후 10년 안팎에 불과하다며 이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다.

중국선교 전문가들은 “중국교회가 순수성을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미약한 신학적인 기반
을 올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남아있는 한국교회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
은 특히 “중국유학생 출신들을 선교자원화하고 중국 각 지역 전문가들을 양성,지역 특성에 맞는 선
교전략을 세워나가는 것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48
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8-08 (금) 12:54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7339    
중국 선교의 개척자 윌리암 번스
중국 선교의 개척자 윌리암 번스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한 말씀의 종인 윌리암 번스는 대학시절에 세계선교 명령을 영접하였고 고국에서 큰 성령의 역사를 이룬 후에 중국선교에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중국 영혼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쉴 새 없이 개척역사를 섬겼고, 그가 끼친 개척의 모범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큰 감동을 주어서 테일러는 그를 영적인 아버지로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 일생을 사도 바울처럼 결혼도 하지않고 복음전파에 충성하다가 만주땅에서 병사한 번스를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스코틀랜드에서 이룬 놀라운 성령의 역사  
윌리암 찰머스 번스(William Chalmers Burns) 는 1815년에 스코틀랜드 던(Dun)에서 목사가정의 좋은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10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여서 13세 때에는 에버딘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어려운 라틴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배웠습니다. 그는 에버딘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은 수재였습니다. 그당시 변호사였던 번스의 삼촌은 그가 법관이 되어서 장래에 촉망받는 젊은이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번스도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부모님과 장래 방향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응은 놀랍게도 법관보다도 주의 종으로 일생을 헌신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이런 생각을 번스는 이해할 수 없었고 반발하는 마음으로 법학도로 성장하기 위해 에덴버그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입학서류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마음은 편칠 않았는데 특히 아버지가 간곡히 권면하시던 말씀과 콜레라로 인해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며 자신의 인생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선물로 사주신 Pike의 Early piety라는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아시고 이해하고 계셨다"라는 말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지고 있던 무거운 죄짐과 삶의 짐이 벗어짐을 느꼈고 이후로 일생을 주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후 번스는 방향을 바꾸어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글라스고우 대학에 입학하였고 이곳에서 밀톤교회의 목사였던 John Duncan 목사의 메시지를 들으며 많은 영적 감화를 받았습니다. 특히 중국에 선교사로 가게 된 James Kally라는 사람의 간증을 들으며 번스도 장차 이방땅의 선교사가 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학교내에 학생 선교협의회를 창설하여 영향력있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회에 자신을 선교사로 써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띄웠습니다. 1939년 3월에 번스는 목사안수를 받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베드로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의 건강이 악화되어서 잠시 동안 대신해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번 연기된 선교사로서의 출발은 여러가지 연속되는 일 때문에 9년 간이나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번스는 빨리 나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본국에서 오랫동안 일하도록 하심으로 빼어난 말씀의 종으로 연단시켰습니다.
그는 던디의 성베드로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하였는데 처음부터 우렁찬 목소리로 확신있게 말씀을 증거하므로 청중을 사로 잡았습니다. 첫 사역지에서 성공적으로 역사를 이루면서 또 그는 아버지가 목회하고 있던 길시드에도 가서 열정적으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주일 예배에 참석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화요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5시간이나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물 속에 침몰해가는 배의 비유를 들면서 당장에 구원선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열정적으로 권면했습니다. 그후 다시 던디로 돌아와서 그는 주일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힘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한번 메시지를 전하면 3시간은 보통이었습니다. 매일 밤 저녁 설교가 있었고 이 모임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던디에서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고 계속해서 Perth와 Aberdeen, Newcastle 사역을 섬겼습니다. 그는 요나단 에드워드의 유명한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매우 좋아하였고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회개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또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야외설교를 많이 행했으며 가는 곳마다 큰 성령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길가에서나 시장에서나 배 안에서나 어디에서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너무 목을 많이 쓰자 인후증으로 고통받게 되었고 결국 휴양지로 휴양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휴양지에서도 일주일 스케줄을 빡빡하게 짜서 쉴새없이 공부하고 또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휴식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몇 년 동안 할 일을 몇달 동안 하였고, 몇 달 동안의 일은 몇 주에, 몇 주의 일은 몇 일만에 해치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전천후 전도자"라고 불렀습니다.  

Ⅱ. 중국으로 가서 허드슨 테일러와 잠시 동역하다  
번스가 카나다에서 2년 동안 삼촌들의 사역을 돕다가 돌아왔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 본부에서는 중국으로 파송할 선교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번스는 중국선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들리는 소문만으로도 중국이 얼마나 힘든 선교지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외부의 어지러운 정치상황, 지저분한 환경, 뜨거운 날씨, 장마비, 변발, 전족 등은 사람답게 살기에는 적절치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매달 수 백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 스코틀랜드에서 유명한 말씀의 종으로서 얼마든지 편하게 영광스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찾았습니다. 1847년 4월 20일 그의 나이 32세 때 그는 드디어 중국 선교사로 나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교부에서는 "번스씨, 그럼 언제 떠날 수 있겠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는 "내일 당장이요"라고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중국행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남아메리카 최남단을 삥 둘러서 가는 이 여행길은 홍콩에 도착하기까지 5개월이나 걸리는 대단히 길고 위험한 항해였습니다. 번스는 항해하는 긴 시간 동안 무엇보다 중요한 중국어 공부에 힘을 쏟았습니다. 미리 준비해온 영어 - 중국어 사전과 40년 전에 중국선교사로 떠났던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번역해 놓은 마태복음을 펴놓고 중국어 숫자부터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절마다 한자 한자 중국어와 영어를 비교해가며 단어들을 익혔습니다. 1847년 11월 13일 고향을 떠난 지 5개월만에 드디어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홍콩에 도착해서 많은 일을 하고자 하기보다 우선 어학공부에 전무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영국 사람들 틈 속에서 독학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거처를 중국인들만 살고 있는 집에 자취방을 구해 옮겼습니다.
그는 중국인들 틈 속에서 혼자서 몸으로 부딪치며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만 일년을 어학정복을 위해 노력한 다음, 그는 이제 중국본토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선교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외국인의 출입이 허용되는 광동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파란눈을 가진 그가 희귀한 동물이라도 되는 양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창하게 광동어를 말하는 것을 알고 금방 친해졌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강둑 또는 나무 아래 앉아 중국어 성경을 펴놓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성경을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때로는 그들의 집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상한 책을 읽는 남자と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종종 잘 곳이 없어 곤란을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여관 주인들이 파란 눈을 가진 "서양 귀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광동에서 16개월을 사역한 번스는 새로 합류한 의료 선교사 영과 함께 새롭게 항구도시인 아모이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아모이에서 번스는 중국어 문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천로역정 1부를 중국어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예배 때 부를 찬송가들을 모아서 중국어로 번역하여 찬송가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특히 시장 주위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주의깊게 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17명(9명은 여자)의 중국인이 세례를 받게 되었고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얼마 못가고 번스는 고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동역하던 영 선교사의 부인이 출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충격 때문에 영 선교사도 크게 마음에 상처를 받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 선교사를 데리고 스코틀랜드에 온 번스는 시간이 나는대로 전에 사역하던 교회를 방문하며 중국 선교보고를 하고 중국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중국의 양떼들로부터 애타게 목자를 찾는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인즉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싶어 몰려오지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번스의 마음은 다시 중국으로 향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온 지 한달만에 영 선교사는 건강을 회복치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번스는 그의 죽음을 보고 자신도 하늘 나라에 가기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복음전할 것을 다짐하고 사명의 땅인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855년 그의 나이 40세 때부터는 상해를 중심으로 하여 돛단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리며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허드슨 테일러라는 유능한 청년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한 해 전부터 중국에 들어와서 이곳 저곳에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마음이 통해 7개월 간을 같이 동역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많이 배웠습니다. 번스가 처음 테일러를 보았을 때 이미 그는 중국 옷을 입고 변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영국사람인데 헐렁한 중국옷을 입고 앞머리를 밀어버리고 뒷머리를 땋아서 돼지 꼬리처럼 축 늘어뜨리고 또 머리 염색까지 한 모습은 정말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번스는 변발의 유익함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는 어중이 떠중이 구경꾼들이 몰려 들어서 방해를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테일러의 주위에는 조용히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집안에까지 초청을 받아 자연스럽게 어울렸습니다. 번스는 테일러의 방법이 좋다는 것을 확신한 후 즉시 테일러와 같이 중국옷을 입고 변발을 하였습니다. 그는 대선배 선교사였지만 후배의 좋은 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졌습니다. 한편 테일러가 번스에게 배운 것은 훨씬 더 많았습니다. 테일러에게는 번스가 대학교육보다 더 좋은 실물교육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번스는 17세 연상이요 7년 먼저 중국에 와서 살았고 열정적으로 각처에 다니며 전도를 하는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번스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생활과 기도생활은 테일러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테일러는 번스를 자신의 영적 아버지로 여겼고 열심히 배웠으며 나중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윌리엄 번스는 내게 있어 그 어떤 신학교에서 받은 교육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내게 있어 살아 있는 모범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날 이들은 스와토우라는 곳에서 온 배의 기독교인 선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와토우는 소돔과 같은 도시로써 단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습니다. 선장의 간곡한 권면을 듣고 테일러는 곧 그곳으로 가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번스는 상해를 떠나기 어려운 형편이라 서로 떨어져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큰 갈등이 생겼습니다. 며칠 후 허드슨은 사랑하는 선배를 떠나야 하는 고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번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조용히 듣고 있던 번스는 "하나님께서 오늘 저녁 나를 스와토우로 부르셨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즉시 스와토우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에는 악명높은 유럽 상인들이 무리를 지어 호화스럽게 살고 있었으므로 유럽인들을 좋아하는 중국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였는데 그들에게 은인이 나타났습니다. 광동에서 온 한 상인이 중국인 옷차림과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괴상한 두 유럽인을 보게 되었을 때 그 중 하나가 윌리엄 번스 즉, "그 이상한 책을 읽던 남자"임을 깨닫고 앞장서서 방을 구해주었습니다. 스와토우 사람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 야만적이고 도덕성이 타락하였습니다. 여름이면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일을 했고 상대방 씨족의 사람들과 싸움을 하고 나서는 포로를 토막토막 내서 죽이고 또 포로의 내장과 심장을 삶아서 먹었습니다. 또한 아편 중독자들이 많아 난잡한 성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이 많아 도적질이 성행했는데 한번은 번스도 두눈 뜨고 보면서 깨끗이 당했습니다. 그때 마침 스와토우의 한 고관이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중국인 한의사들의 치료를 받고도 낫지 않았지만 테일러의 치료를 받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어쩔줄 모르던 이 고관은 선교사들이 시내에 병원을 설립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이제 테일러는 병원 자료 준비를 위해 상해로 떠나야 했고 이것은 그들의 영원한 작별이 되었습니다. 테일러가 상해로 간 후 번스는 두 중국인 전도자와 함께 시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외국인의 침입"소식을 들은 관원들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재판관이 번스에게 양쪽 무릎을 꿇을 것을 명하자, 그는 "나는 당신을 빅토리아 여왕만큼 존경하지만, 오직 왕중의 왕 여호와 하나님께만 무릎을 끓을 수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그의 당돌함에 놀란 재판관은 그에게 한쪽 무릎만 꿇어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번스는 광동에 있는 영국대사관으로 넘겨져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Ⅲ. 최후의 그날까지  
1863년부터 번스는 북경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곳에는 환경이 잘 예비되어서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큰 집을 갖고 편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번스는 이러한 여유있는 생활이 오히려 부담스러웠습니다. 그의 마음은 항상 복음을 듣지 못한 새로운 땅으로 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으로 후배들을 위해 길을 닦아 놓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즉시 중국의 북부, 한반도와의 경계부분인 뉴창으로 사역지를 옮기고 열심히 그곳 방언을 익히며 복
음을 전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인생도 종착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868년 1월 그의 나이 53세 때 그는 만주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심한 기근 속에서 열과 오한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제자 윙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누워있던 옆방에서 아침 기도회를 갖도록 함으로 그들의 기도소리와 찬양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더라도 이 사역을 더 힘써서 계속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말할 수 없이 행복하오. 죽음 후에는 더 큰 기쁨이 나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요. 내가 이 땅에서 한 일은 아주 적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이오. 자, 이제 당신들은 내가 그동안 가르쳤던 기독교가 참 진리라는 것을 보고 있소. 왜냐하면 죽어가는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 때문에 조금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1868년 4월 4일 윌리암 번스는 53세로 그의 위대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일생은 사도 바울의 일생과 흡사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결혼의 꿈도 포기하고 일생 독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또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유명한 부흥사로서 얼마든지 존경받으며 살 수 있었지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힘써 순종했습니다. 중국땅에서도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해안의 좋은 지역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는 중국 최남단 광동에서부터, 상해, 북경, 최북단 만주까지 쉴새없이 복음을 전파하러 다녔습니다. 그는 그의 말대로 복음의 씨를 뿌리러 다니는 씨뿌리는 자였습니다.
결국 만주땅 한 오두막집에서 병사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주님께 온전히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졌습니다. 그의 이러한 삶은 고향에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후에 많은 젊은이들이 중국에 가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참고도서
1. R. Strang Miller, "Five Pioneer Missionaries", The Banner of Truth Trust
2. 사단법인 아세아 선교회, 미션월드

출처/ubf
     
  47
작성자 오지소식
작성일 2003-08-08 (금) 12:42
분 류 선교자료
ㆍ조회: 6168    
최초의 중국선교사 모리슨
             최초의 중국선교사 모리슨 
                                                  김현숙 선교사

모리슨(Rev. Rogert Morrison D.D)이 신교 첫 선교사로서 중국에 도
착한 것은 1807년 9월 4일이다.
이보다 200년 전, 이태리 예수회 동방 감독 알렉산더 발리그나니
(Alexander Va -ligmani)가 마카오에서 10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중국대
륙 입국을 여러 번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의 기대는 좌
절되고 말았다. 마침 1606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중국대륙울 바라
보면서 절규에 찬 한마디 부르짖음을 날려보내었다. 석두(石頭)야 석두
야 네가 언제 비로소 내 주님을 맞아들이랴?
발리그나니의 비통한 이 한마디는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그 긴 여운
을 남기게 된 것이다. 발리그나니가 간 후, 중국은 19세기 중반까지 봉
건주의 사회의 담장을 높이 쌓고 있었다. 이 사이에 로마 천주교 선교사
들은 비밀리에 대륙에 잠입하여 절강, 강서, 호광, 상동, 몽고, 운남, 귀주
등에 교구를 설치하고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선교를 했다. 남경조
약을 전후, 중국대륙에는 이미 32만 명 정도의 로마교 신자들이 있었다
고 한다.
중국은 17세기 중엽 모리슨이 중국의 신교 첫 선교사로 마카오에 도
착했을 당시 만주족이 남진하여 한족의 저항을 진압하고 청정부를 설립
(1644-1912), 1792년 네팔을 공벌함으로 18세기의 문치 무공 전성시대를
이루어, 대국의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때는 청조 가경 황제 12년, 아편전쟁 전 33년, 미국 독립건국 후 31년,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워털루(waterloo)에서 패전하기 전 8년, 당, 원대
에 이어 기독교 종파 외국 선교사로는 네 번째, 신교 선교사로서는 첫
번째로 중국땅을 밟은 것이다.
모리슨은 1782년 1월 5일, 영국 노덤벌런드(Nothumberland)에 있는
모패드(Morpeth)에서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이은, 청빈한 기독교 가정에
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리슨이 어릴 때에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생활의 감화를 많이 받았다.
모리슨이 태어난 가정은 그의 아버지가 신발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
한, 비교적 가난한 가정환경이었으나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엄격히 지도
했다. 1802년 모리슨의 나이 20세 되던 해 모리슨은 일생 처음으로 인생
의 슬픔이란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이 세상 가장 가까이서 가장 존경하
던 어머니와의 헤어짐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모리슨의 마음은
공허로 가득 찼다. 그러나 평소에 어머니가 자상하게 가르쳐 준 성경들
을 기억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은 것이다.
모리슨은 열 두살 때에 성경에서 가장 긴 분량의 시편 119편을 하룻
밤에 다 외울만큼 총명했다. 어머니가 지나간 세상, 그 어두운 밤의 외
로움들을 시편 119편을 외며 잠이 들곤 했다.
어느 날 모리슨이 그의 인생에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선
교사가 되어, 인생을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각오한 것이었다. 모리
슨의 이 각오는 그로 하여금 마음을 불타게 했다. 그것이 하나의 순간적
인 충동이 아닌, 어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강한 도전으로 그의 젊음을
재촉한 것이다. 어머니를 여윈 마음의 아픔도 가시기 전 그해 바로 런던
으로 간 것이다. 런던에서 모리슨이 혹스톤 아카데미를 거쳐서, 1803년
고스포트(Gosport)의 선교사 아카데미(The Missiona- ry Academi)에
전입하게 되었다. 여기서 모리슨은 중국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에 가서 복음을 선교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전신을 사로잡
았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중국대륙에 뛰어 들기로 각오한 것이다. 마
침 1805년, 모리슨의 나이 23세 때, 런던 선교회에 중국선교를 위한 신
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 이듬해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을 중국선교사로
내정하고 본격적인 선교사 훈련을 시켰다. 특히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서적들을 통하여 현지훈련을 하고, 의학 및 천문학 지식까지 갖추
게 되었다. 1807년 1월 8일에 목사로 장립을 받고 그 달 31일에 25세의
애띤 나이로 레미탠스(Remitance)호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 배의 목
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레미탠스호는 모리슨을 싣고 미국을 향하여 선
수를 잡고 있었다.
모리슨이 레미탠스호를 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영국과 중
국의 외교관계는 동인도회사 독점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인도
회사가 대중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인도회사가 재중국 무역의 전매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
의 영업상의 이익보장을 위하여, 다른 목적으로 회사 배를 타는 것을 금
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모리슨이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모리슨이 레미탠
스호를 이용한 것은,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가기 위한 계산이 있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는 우회길은 멀고도 험했다. 꼬박 110
여일 간,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4월 20일 드디어 뉴욕항에 닿은 것이다.
레미탠스호의 항해는 장차 중국대륙에서 겪을 선교사의 길을 예고나 한
듯, 만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워싱턴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제임스 매디
슨으로부터 중국 광동주재 미국 영사에게 전달하는 소개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매디슨은 모리슨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적극
적으로 도와주었다. 모리슨은 매디슨의 소개장을 깊이 간직하고 5월 12
일, 트라이던트(The Trident)호에 올랐다. 이 배의 기항지가 중국대륙이
다. 대양의 거친 파도를 헤집고 트라이던트호는 중국, 그 수천 년의 역
사로 다져진 대륙을 향하여 조타기를 움직였다. 모리슨은 감격에 겨웠
다. 매디슨의 소개장보다 하나님이 그를 소개하는 성경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준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 영국 청년이 장차 세계
선교 역사에 큰 금을 그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제깐 놈이 무엇을 한담." 이런 멸시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없지가
않았다. 중국을 오가면서 중국사람들과 부딪힌 경험이 있는 뱃사람들은
모리슨의 중국여행을 우습게 본 것이다. 먼 항해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뱃사람들은 당돌한 이 청년을 붙들고 시간을 보낸다.
"여보, 모리슨 선생! 당신이 과연 우상을 숭배하는 중국의 습관을 바
꾸어 놓을 수 있겠소?"
모리슨은 태연 자약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선생, 그러나 나는 하나
님께서 능히 하실 것을 믿습니다."
미국을 떠난 트라이던트호가 일백 수일이 지나던 날, 모리슨이 갑판
위로 올라가 항해의 피로를 풀고 있을 때였다. 배가 밀려가는 쪽, 수평
선 위로 검은 땅 덩어리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것이 바로 중국땅이란 것
을 직감한 모리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격의 환성을 터뜨리고 말
았다.
"중국, 아- 중국!…"
1807년 9월 4일, 대양의 험난한 뱃길을 외롭게 떠 온 트라이던트호는 그
피곤한 선체를 마카오 연안에 맡겼다. 모리슨이 그렇게도 그리워하였던 땅,
여기서 죽기로 한 땅, 그 중국 대륙에 닿은 것이다. 대륙의 진한 흙 냄새가
풍기는 땅을 모리슨은 힘있게 밟았다. 삭풍이 밀려오기에는 아직도 이른 계
절이지만 산줄기를 끼고 내리는 대륙의 냉기가 모리슨으로 하여금 이방지대
의 정을 느끼게 했다. 두 손을 들어 환영하는 사람도 없다. 물론 모리슨이
처음부터 그런 형식 같은 것을 생각지는 않았다. 사실 그를 맞아 줄 사람도
거기에는 없었다. 이런 격식은 차차하고 동인도 회사 마카오 주재 대표부의
모리슨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를데 없이 오만하고 거칠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상인 이외, 그 누구도 이곳에서 머물 수 없다는 사실
쯤은 알고 왔을 테죠" 모리슨은 갈 데가 없었다. 돈독히 든 동인도 회사 사
람들과는 얘기 상대가 안되었다. 게다가, 이미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로마 천주교 신부들은 모리슨이 마카오에서 어정대는 것을 눈의 가시
같이 여겼다. 9월 7일, 그날은 주일이다. 마카오를 떠나, 광주에 도착하니 밤
8시였다. 거기에는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이관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오랑캐를 이족이라 불렀다. 이 말을 외국 사람들에게 붙여서 쓴 것은 외국
인들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관은, 곧 서방인으로서 중국에 밀입
국하였거나 또 입국 목적이 분명치 않는 외국인들을 임시 수용하는 곳이다.
그날 밤 모리슨은 이 이관에 들었다. 이관은 당국의 감시가 엄격한 데다가
여기저기 나붙은 이관 규칙들은 이 젊은 영국 나그네를 더욱 긴장되게 했
다. 모리슨이 훑어본 이관의 규칙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외방인이 멋대로 광주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② 외방인의 경우 상무관계로 광주에 머무는 때는, 상관 내에 거주지를
제한한다.
③ 외출은 매월 세 번 할 수 있으나 매월 8일, 18일, 28일로 제한하고 매
번 10명 이내로 한다.
④ 외방인이 이관 내에서 부부의 정을 나누는 것을 금지한다.
몽매에도 그렸던 중국 대륙에서, 모리슨은 오랑캐 신세가 되어 수용 생활
을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온 이상, 이런 것쯤이 문제되어서는 안된다. 얼마 후 수용소를 나온 모리슨
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중국인과 같이 행세한다. 중국인의 옷을 입고 그들의
음식을 즐겨 먹으며 부지런히 중국 사람을 만났다. 모리슨의 이런 행동을
철없는 젊은이의 부질없는 모험이라고 하자. 모리슨은 그때까지만 하여도
중국 대륙의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청조는 외국인에 대
하여 다음과 같이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① 중국인이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② 비상 외인이 광주에 오래 머물 수 없다.
③ 외국인에게 서적류를 파는 것을 금한다.
④ 마카오 로마 천주교 선교사가 기독교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
모리슨은 사면초가였다. 그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돈이 없다. 먹을 것도 문제지만 등 댈 곳이 없다. 다행히 화물 창고 지하실
방 한 칸을 세로 얻을 수 있었다. 습기가 차고 창 하나 없는 방이다. 악취가
호흡기의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중국 선교 첫 선교사의 생활이 이렇게 시
작된다. 화물창고, 지하실, 그것도 넉넉잖은 공간이다. 이 숨막히는 공간에서
젊은 선교사 모리슨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향하여 가슴을 넓게, 더 넓게 편
다. 돈도 없지만, 배고픔을 참아 가며 현지어 공부에만 몰두한다. 그러던 어
느 날 그의 몸은 쇠약하여 마침 곤경을 헤맨다. 화물창고, 퀴퀴한 냄새가 저
려진 지하실 셋방에서……. 누가 그에게 냉수 한 그릇 받혀 줄 사람이 없
었다. 이 때 모리슨은 인간적인 비참과 삶의 좌절이 교차하는 공간을 꺼질
듯 꺼질 듯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는 모리슨이 광주에 온 지 8개월, 이때
모리슨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 절박한 환경에 처했던 모리슨의 심
정이 나타나 있다. "어제 자네의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네. 나는 그 동안,
최소한 200통의 편지를 썼다네. 그러나 내가 회답으로 받은 편지는 고작 두
통 뿐이야."
모리슨의 이 편지에는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서 피할 수 없었던 그 고독
한 환경이 엿보인다. 이것은 또 호사스러운 감정이라고 하자. 선교사에게는
항상 추방당할 수 있는 불안과 그런 압박감이 있는 것이다.
청조가 쉽사리 모리슨을 받아 줄 여유를 가진 것도 아니고, 동인도 회사
역시 무역 이익상 한푼 어치의 도움이 없는 모리슨을 감쌀 이유가 없는 것
이다. 더욱이 마카오 주재 포르투갈 천주교 신부들은 모리슨이 빨리 쫓겨나
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리슨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여 있었다. 이 현실의 늪
을 헤어나야 한다. 어느날 그는 중대한 단안을 내렸다. 그것은 중국 대륙을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는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다. 1809년 2월 20일,
모리슨은 동인도 회사 통역 사원으로 정식 입사했다. 그러나 모리슨은 자기
현실에 대한 모순과 심한 갈등으로 다시 방황했다. 이때, 모리슨의 심정이
그의 일기에 그려져 있다.
"나의 선교사 직책은 나의 모든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물며 선교 직무와
관련 없는 다른 각종 사무는 나의 감정과 상반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모리슨이 본의 아니게 동인도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런 일방
적인 조치는 선교사로서의 신변보장에 대한 안전을 추구한 것이고, 다분히
경제적 타개책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모리슨은 최근 그의 신변에서 일어
난 일들에 대하여 즉시 런던 선교회 본부에 보고했다.
① 나의 취직은 중국에서 안전하게 거류할 수 있는 신변조치이며,
② 본인의 맡은 통역 일은 나의 현지어 학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③ 나의 선교활동에 대한 영국 교회에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일이며,
④ 이로 인하여 동인도 회사 주재 직원들이 선교사인 본인을 경원시하
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임.
모리슨의 이 보고는,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의 동인도 회사 취직을 문책한
데 대한 그 해명으로 보여지며 따라서 이 일로 선교사에게 가해질 수 있는
행정적인 조치를 고려해 주기를 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모리슨
의 동인도 회사 취직 문제는 현지 선교사와 본부와의 적지 않은 파문을 가
져오게 했다. 이 일은 모리슨에게 결국 무거운 부담이 되고 말았다.
모리슨이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던 날, 마카오 주재 영국 상무의 일을 보
는 모르톤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 모리슨이 중국에 온 지 만 1년 5개월 되
던 때였다. 그렇게 길고 외로웠던 중국 생활이 끝나고 모리슨은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마카오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리슨의 회사
안에서의 일이 1년 중 최소한 6개월은 광주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런 사정
을 모리슨은 고난 중에서 만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잔잔한 신혼의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과 장기간 별거한 정신적 불안과 우울감에 잠겨, 몸의 허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 불행스러웠던 것은, 첫 아들이 태어나서 세상 빛
을 보기도 전에 요절한 것이다. 20세 때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던 모리슨이 두
번째로 만난 혈육의 죽음이다. 모리슨은 이국 땅, 냉랭한 하늘 밑에서 혈육과
나누어지는 사활의 비정한 고통을 아내와 같이 감내해야만 했다. 아들의 잃은
메리의 심적 고통이 모리슨의 그것보다 훨씬 더했다. 그러한 공허한 마음을 가
누지 못하던 메리는 마침내 건강이 악화되어 두 자녀를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
가야 했다. 그때가 1815년이다. 이로부터 6년후 1821년 메리가 건강을 되찾아
마카오로 다시 돌아옴에 따라 모처럼 가족들이 오붓하게 어울려 사는 삶의 즐
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런 즐거움이 선교사에게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인간적인 욕심일까? 모리슨의 단란한 가족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
다. 모리슨에게 또 다른 시련의 충격이 예비되고 있었다.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던 메리가 끝내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마카오에서 죽었다. 모리슨의 곁을 냉
정하게 떠난 것이다. 할 일 많은 선교현장에서 모리슨의 다정한 벗으로 남아
주지 않고 오히려 모리슨의 가슴에 응어리를 남기고 메리는 혼자 훌훌 가 버린
것이다. 아내의 시신을 낯선 땅, 고통과 눈물과 가난과 냉대와 외로움이 얽혔던
땅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의 아픔이 몰려올지도 모를 땅, 그 중국 땅 한 모퉁이
에다 묻어 두고 …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아들과 딸을 볼 때 눈물이 내 무릎을 온통 적시는
구료. 아내를 구하지 못하고 먼저 보냈구료. 이 험한 세상을 떠나 저 나라에 이
르면 아 … (생략) 그를 만날 걸세." 새파란 젊은 나이에 성경 한 권 들고 찾아
온 중국 땅에서 선교사 모리슨이 겪은 고난과 역경이 이만하면 족한 것인가?
메리를 먼저 보낸 눈물이 아직 마르기도 전, 1822년 6월 2일의 일이다. 또 한
통의 비보를 접한다. 모리슨에 이어 두 번째 선교사로 중국에 온 적이 있던 밀
네 목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밀네가 중국에 와서 입국 허가를 받으려 하다
가 불법 체류한 이유로 추방되어 말레이지아에 가서 일하다가 죽은 것이다. 모
리슨의 막역한 친구 밀네, 중국 선교현장에 차례로 뛰어들어 숱한 고난의 길을
멀리 두고 조용히 떠나 버렸다. 이제는 흘릴 눈물도 없다. 아쉬움만 남았다. 담
담한 심정으로 그 앞에 남은 길을 모리슨이 걸어야 한다.
그러나 모리슨이 뛰어넘기에는 중국선교의 벽이 너무 두껍다. 그 길은 만리
장성보다 더 길게 누워 있었다. 인간 모리슨이 걸어가기에는 지척을 헤아리기
어려운 캄캄한 역사의 밤이 중국대륙의 산하를 무겁게 가리우고 있었다. 이런
현실 앞에 설 때마다 모리슨은 그의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냈네. 지금은 또 밀네를 … 그러나 나는 결코
원망하지 않네. 비록 나 홀로 여기에 남아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이전부터 도와 주셨네(생략). 그것이 벌써 15년이라네 … 내가 자네에게 더 많
은 글을 쓰고 싶으나 시력이 좋지 않네. 일하는 힘도 좀 쇠약해진 것 같네(생
략). 나는 내가 장래 내가 일하고 있는 이 땅에서 죽고 싶네."
모리슨은 천성적으로 감정이 풍부한 데다가 남달리 섬세한 성격을 가졌던 탓
으로 인생의 고통의 파장은 너무 컸고 너무 길었다.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에서 그가 겪는 고난의 현실에 대한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나의 용기와 인내는 이제 거의 다 탈진되었네 … 어쩌면 이것이 내 고독의
한 단면인지 모르겠네. 나는 이제 자유가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네. 나의 현실은 끊임없는 공포, 핍박의 손길이 닿고 있다네 …"
1822년 11월 1일 광주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외국인 주재 상사들의 피해가 막
심했다. 회사 업무 기능이 마비되었다. 모리슨은 중국에 온 지 16년만에 처음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모리슨이 암스트롱 양과 두 번째 결혼하고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
와 동인도 회사에 계속 근무하면서 선교활동을 탐색했다. 모리슨의 주재 무역
상사 직원이라는 신분이 당시 중국 상황에서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케 했다.
1816년 상사 출장 관계로 대륙 북부 지역까지 깊숙이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리슨이 중국 첫 선교사로 선교현지에서 겪은 27년간의 파노라마는 인생의
진한 아픔으로 점철되었으나 고난 가운데서 쌓은 선교의 업적들은 후대 선교
사들이 길이 가려야 할 일들이다. 모리슨의 번역 사업을 도와준 양 발, 그가
1816년 11월 3일 말레이지아에서 밀네 목사로부터 세례받고 1821년 모리슨 선
교사에게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27년간의 모리슨의 중국생활은 기독교 선교역
사는 물론 중국교회와 중국에 기여한 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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