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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국 광저우(廣州)시의 1인당 GDP는 4,586달러로 베이징(3,000달러)과 상하이(4500달러)를 초월하여 전국 10대 도시 중 최고의 부자도시로 되었다. 또한 광저우 시민이 지배할 수 있는 수익은 14,416 위엔으로 7%의 성장을 보였다. 통계에 따르면 광저우 시민의 엥겔 지수는 40%로 낮아져 (유네스코의 기준에 따르면 40%이하는 부유계층에 속한다) 부유계층의 운전에 다가서고 있다. 작년 광저우시의 사회소비품 소매총액이 1,243.9억 위엔으로 14.6%이나 증가했다. 자동차와 내집마련은 주 소비품목으로 되었으며 2001년 광저우의 자동차 매출은 19%이나 증가했다. 주택관련 소비는 소비지출의 13.9%을 차지했다. 또한 광저우 시민의 생활도 디지털화, 고품격화 되어 가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가정 컴퓨터의 보유율은 60.8%, 이동전화는 109.4%으로 나타났다. 교통, 통신, 오락, 문화생활, 교육의 지출은 소비지출의 21.6%을 차지하고 있다. 출처/신화사 2월6일 참조, 남종호 호선생: 한국 따라 잡은 광둥성의 '25년 질주' 조선일보 2003.11.09 자 광둥(廣東)성 주민들에게 올 12월은 ‘잊을 수 없는 달’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사망과 문화대혁명의 광풍(狂風)이 끝난 후 복권된 덩샤오핑(鄧小平)은 꼭 25년 전인 1978년12월 공산당 ‘11기 3중 전회’를 통해 “중국 국가목표를 정치(계급투쟁)에서 경제로 옮길 것”을 만방에 선포했다. 개혁 개방의 팡파르였고, 이 때 첫 시험대로 뽑힌 곳이 광둥성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광둥성을 찾아 이렇게 호소했다. “중앙 정부는 돈이 없다. 줄 것이라고는 정책뿐이다. 정책을 줄 테니 먼저 나가라. 그리고 죽도록 싸워 잘살아보라….” 덩샤오핑의 복안은 경제특구(特區)였고, 경제특구 1호는 홍콩을 바라보는 작은 어촌 선전(深 )이었다. 이후 이곳은 개혁개방 정책의 최전선 전투장이 됐고, 덩샤오핑 유지대로 죽도록 싸웠다. 25년이 흐른 지금 선전특구는 중국 내 최고 갑부 도시로, 광둥성은 중국 내 최고 부자 성(省)으로 변모했다. 중국의 최남쪽 1개 성에 불과한 이곳이 중국 무역의 38%, 외자유치의 27%를 ? -[03/16-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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